조언을 받아들이기

총무간사로 섬길때, 여러가지 어려운 것들이 있었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조언’을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많은…

생전 처음 본 사람이 다짜고짜 코스타란 이런 것이라며 일장 훈시를 늘어놓으시기도 하고,
한시간씩, 전화를 통해서 일방적인 ‘조언’을 들어야만 했던 적도 있었다.
정작 본인은 중학교때 반장해본 이후로는 한번도 리더쉽을 행사한적이 없으면서, 리더쉽에 대해 나름대로의 강의를 해주시면서 조언을 해주시기는 분도 있었다.
코스타의 10년동안 나아갈 방향을 혼자서 쫘악~ 제시해 주시는 분도 있었고,
난데없이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보았다며 “신령한” 얼굴로 접근하는 분도 계셨다.
자신의 경험만을 절대화하여, 내 상황 혹은 코스타의 상황에 자신의 경험을 적용하라고 강요하시는 분도 많았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내가 섬기는 내용과, 나를 잘 이해하고 있고, 지금 코스타의 상황등을 잘 읽으며 주시는 적절한 조언들도 있었지만,
대략 80% 정도의 조언은 out of context의, (죄송하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들이었다.

이미 우리가 다 마음에 두고 계획하여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그 일이 꼭 필요한데 계획을 하지 않는다며 꾸중(?)을 들어야 했던 경우도 있고,
5년쯤 전에 이미 고민과 정리가 다 끝나서 정리가 된 일들에 대해 심각한 얼굴로 매우 새로운 이슈라며 얘기해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코스타가 맞닥들이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닌데,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제일 중요한 거라며 목청을 높이시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경우에는…
대개 참 애매하고 어색했다.
소위 ‘내부사정’을 시시콜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그것을 대외적으로 share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데다,
그렇게 설명을 해도 조언을 해주시는 분이 이해를 하시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다고 그냥 듣고나서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나 혼자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내기에는, 조언을 해준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했다.

어떤 순간에는,
내게 쏟아지는… 그 out of context의 엄청난 조언의 홍수 속에서…
한 두어주만 잠수타면 참 좋겠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전화를 받거나, 이메일을 여는게 두려운적도 있었다.
(어떤 어르신들은,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역정을 내시기도 하셨다. -.-;)

그렇게 out of focus, out of context의 조언을 들을 때면,
그냥 ‘인자한 얼굴’을 하고 그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다.
혼자 애국가 가사를 몇번씩 외기도 하고…
(언젠가… 어떤분과 전화하면서는 시편 23편을 한 30번쯤 암송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분들의 그 모든 조언들 속에서 소중한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out of focus, out of context의 조언이지만, 그 조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는 것들을 보게되는 경우가 있었다.
혹은, 그 사람이 그렇게 조언을 남발해야만 하는.. 그 사람의 personal need/상처를 바라보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렇게 내게 와서 조언을 해줄 정도록 정성과 열정이 있는 그분들의 마음을 감사히 보게되기도 하였다.
아주 황당한, 거의 말도 되지 않는 조언을 듣게되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정말 급하셔서, 이렇게 말도 안되는 조언을 통해서라도 내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보다” 하며 귀를 기울이게 될때도 있었다.

물론, 내가 간과했던, 중요한 point를 깨닫거나 재확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많은 분들의 조언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는 일들이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였다.

지금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일들을 잘 하고 있는걸까?

언제 좀 더 성숙해지면,
그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게될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은… 많은 노력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내 죄된 본성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주변 사람으로부터 소중한 이야기들을 소화시키게 되는 것 같다.

제게 조언을 해주시는 모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영적 은사가 가져다주는 착각

최근, 운동을 하면서 들은 것은, 모 신학교에서 “Postmodern 시대에 그리스도를 선포하기”라는 내용의 시리즈 강좌이다. (아마 한학기 과목인 것 같기도 하다.)
Tim Keller와 Ed Clowney 가 공동 강의를 한 것인데…
어떤 것은 참 깊은 깨달음을 주었지만 어떤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중,
너무나도 당연한, 그러나 내가 한참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한마디.

“영적 은사를 많이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 은사를 활용해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은혜안에 거하며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7장의 다음 본문을 인용하였다.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음이 바짝 말라있고, 배우자가 아닌 이성에 음란한 마음을 품고 있고, 자기 배우자를 미워하고 있고, 다른 이들에 대한 질투심에 가득차 있고, 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에 가득차 있다 하더라고,
그 사람이 매우 훌륭한 설교를 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훌륭한 설교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주님과 건강하게 동행하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된다고.
(특히, 훌륭한 설교가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그런 착각을 쉽게 한다고)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
내가 얼마나 그 일을 잘 하느냐,
심지어는 내가 어떤 value system을 가지고 그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내가 올바로 서있느냐 하는 것을 재는 바른 잣대가 되지 못한다.

나 같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꼭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고 새겨야할 말이다.

사려깊음

사려깊음은, 성품일까 재능일까?

성품이라면 그것이 개발될 수 있는 것이고,
재능이라면 개발될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사려깊음을 성품으로 보았다.
그런데, 점점 그것이 성품이라기 보다는 재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생각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이나 다른이들의 사려깊지 못함을 좀 더 용서하고 수용하려고 하고 있는데…
글쎄.

나보다 큰 사람을 만나면…

나보다 큰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바라보며 몇가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난다.

첫번째는,
그 사람이 나보다 큰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에게서 배우려는 사람이다.
“아 참 그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하더라.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야”
건강한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두번째는,
그 사람과 나를 쉽게 동일시하여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자신도 할 수 있고 그 사람이 하는 생각을 자신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세번째는,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튼튼하게 만듦으로써, 나의 class를 높여보려는 사람이다.
“나 누구도 알고, 누구도 알고, 누구도 알아….”

네번째는,
그 사람을 시기하는 사람이다.

이 네가지의 모습중에…
내게 가장 많은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여러가지로 생각하다가, 최근 그것을 잘 알아낼 수 있는 test를 찾아내었다.

내가 어떤 모습을 보면서 가장 bother가 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3>2>4>1 의 순서로 bother가 된다.
그런 것으로 보아 나 역시 3>2>4>1의 순서로 내 안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대의 나, 40대의 나

20대에
내가 꿈꾸었던 나의 모습,
내가 꿈꾸었던 한국교회의 모습,
내가 꿈꾸었던 세상의 모습…

40대가되어 이제 바라보면서…
한편 20대의 꿈이 얼마나 shallow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보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론, 20대의 꿈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게 되기도 한다.

보여줘야 소용 없다~

섬기고 있는 Christian ministry와 관련되어 있었던 일인데…

매우 엉뚱하고 잘못된 의도로 (자신을 드러내고 스스로 떠보겠다는)
우리가 섬기고 있는 Christian ministry와 함께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온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사람이 지금 당장 뛰어들어서 함께 이 일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짜고짜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우리중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이 그래도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 모임에 초청도 하고 함께 하도록 격려해서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고 그렇게 해보려고 하였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 한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렇게 하는 시도를 할수는 있겠으나, 아마 별로 소용 없을 것입니다. 잘못된 의도와 생각을 가지고 이 사역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하는 일을 아무리 보여주어도… 이 스피릿을 픽업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의 껍데기만을 보고서 그것을 전부라고 보게될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우리가 하는 일의 껍데기는 그 안에 담겨있는 스피릿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그 선배의 진단이 정확했음을 배웠다.

때로,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 동기가 순수하지 못함이 드러날때마다 두려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내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본질을 보지못하도록 막는 것은 아닐까…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 예수를 막 믿게되었던 시절

나는 모태출석 교인이다.
어머니께서 나를 태중에 가지고 계실때부터 교회 출석을 했다.

내가 그 신앙을 내 개인의 것으로 받아들인것은 대학교 3학년때의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그 신앙을 깊이 곱씹어볼만큼 내가 넉넉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아직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던 시절,
신앙이 없으면서 신앙이 있는 척 했던 시절,
진리에 대하여 목말라 했던 시절,
그리고…
그 진리를 막 발견한 직후 내 생각과 감정과 마음이 급속히 바뀌어 가던 신앙의 초기 단계…

이것들에 대한 기억이 자꾸만 희미해진다.

그래서,
내가 그 당시에는 매우 어렵게 받아들였던 개념이나 깨달음들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려 내가 섬기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싶다.

기회가 되면,
내가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에 했던 고민들,
또 내가 막 예수를 믿은 직후에 했던 고민들만을 다시 깊이 곱씹어보는 시간을 좀 갖을 수 있으면 한다.

이 블로그에도 간단하게 그것들을 좀 올리고.

성실함 (6)

 성실함 없이 일을 대하는 것은,
그 일이 그 사람에게 독이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성실함은 성숙함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성숙함이 수반되지 않은 ‘일’은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닐까.

때로 내가 아주 힘들어 하는 것은…
성숙함으로 부터 비롯된 성실함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일’에 뛰어는 사람을 보는 일이다.

물론, 내 자신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볼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

성실함 (5)

내가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할 수준은 안되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성실해진 것 같다.

또한,
내가 대단히 성숙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기엔 형편없이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내 스스로 지난 세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해 온 발자취를 보면,
내 성실함은 내 성숙함을 드러내는 표지였고,
내 성숙함은 내 성실함을 이끄는 힘이었다.

내 스스로 성실하지 못함으로 인해 절망하고 좌절할때,
내가 아끼는 이의 성실하지 못함을 보며 안타까워할때,
하나님의 손길이 당신의 자녀를 성숙함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의미에서 큰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