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릿빠릿한 나

나는 대체로 “빠릿빠릿”한 편이다. ^^
이게 꼭 자랑은 아니고…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이게 자랑이 아니라는게 들어나겠지만…)
그냥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대체로,
이렇게 빠릿빠릿한 사람 옆에,
다소 느긋하거나 동작이 느리다거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게되면,
그 느긋한 사람의 성품은 너무나도 자주 ‘열등함’으로 잘못 비추어지곤 한다.
느긋하거나 여유가 있는 것이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성품은, 그 성품 자체가 공격적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되기도 하고.)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강.적. 들을 만날때가 있다.
느긋하고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옆에서 그 느긋함이.. ‘더딘 열등함’이 아니라…
‘선이 굵은 깊음’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내 빠릿빠릿함이 가벼움으로 비추어지게 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참 좋아한다. 
그들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앞으로 두어달동안… 그런 분들 몇분을 오랜만에 만나게 될 것 같다. 기대가 크다.)

기도는 엔진?

사람들은, 따르고 싶은, 본받고 싶은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의 사상, 논리, 지식등을 많이 배우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어느정도 그 목표를 이루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신앙과 인격의 ‘엔진’과 같은 부분은,
그 사람의 지식이나 사상등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도가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의 기도를 닮지 않고 그를 닮으려는 시도는,
자동차를 모방해서 만들면서 같은 모양과 색깔의 껍데기를 갖추면서도 엔진에 신경쓰지 않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싶다.

기도를 통해 어떤 이가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demonstration인것 같다.

20년전 읽었던 책들을 보며

이번에 한국 출장중에,
주말에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한쪽 방에 잔뜩 쌓여있는 책들을 뒤지던중,
내가 막 복음에 눈을 뜨던 시절, 
정말 그야말로 미친듯이 책을 사서 읽던 시절에 보았던 책들이 아직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와서 그 책들을 보면,
밸런스가 깨진 것도 있었고,
유치한 것도 있었고,
심지어는 읽지 않는 것이 좋을만한 책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 책들을 읽으며,
그리고 성경 말씀 연구를 나름대로 어설프게 해가며,
얼마나 흥분하고 기뻤었던가…

20년전의 내 모습이 그 책들에 담겨 있었다.

이젠 책을 읽으며,
그 책이 어떤 사상의 흐름 속에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보게 되고,
그 책을 비판하는 일부터 먼저 하게 되지만,

20년전에는,
그야말로 ‘아무 책이나’ 읽으면서도…
내 영혼과 생각을 살찌웠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책들로부터 out-grow 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는 하지만,
20년전 내 영혼을 살찌웠던 그 경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기도 하였다. 

Signs of Aging

중년의 나이가 되면서, 내게도 나이가 들어가는 육체적인 sign들이 꽤 있다.
몇가지를 들자면

1. 하루에 다섯시간 수면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
나이가 들면 잠이 주는거 아닌가… 요즘은 여섯시간  – 여섯시간 반 정도는 자 주어야 밸런스가 유지되는 듯.

2. 커피의 효과가 있다.
오후에 커피를 마시면 실제로 밤에 잠이 덜 잘온다. ^^

3. 더 적은양의 음식으로 생활이 가능하다.
예전에 먹던대로 먹으면 금방 살이 찐다.

4. 무리해서 견딜 수 있는 최대 기간이 줄어들었다.
대학때는, 한참 공부 열심히 할때는 일주일 통틀어서 10시간 자며 공부한 적도 있었는데…
이젠 2-3일 정도만 4시간 미만으로 자면 후유증이 며칠 간다.

5. 흰머리가 눈에띄게 늘었다.
^^

6.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하게 된다.

– 아직은 애송이지만…. 

나는 사람들이 싫다

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일반적으로 그렇다. ^^

물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기뻐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어떤 이슈를 풀어나가는 일을 몹시도 고통스럽게 느낀다.

그래서 내가 흔히 취하는 태도는 ‘내가 하고 말지’ 인 것 같다.

가령,
회사에서 복사기 주변이 늘 지저분하면,
함께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복사기 주변을 깨끗하게 하자고 격려하기 보다는,
내가 치워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늘 일복이 넘친다. -.-;

그렇지만 한편 일이 안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겉보기에 매우 부지런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심지어는 착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저 사람들과 부딛히는 것이 싫은 것이다.

“내가 하고 말지” 라는 자세는,
성실함이나 부지런함으로 부터 나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이들과 함께하려는 것을 피하는 게으름에서 나온 것이다.)
착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이들을 정죄하고 속으로 나를 높이는 아주 악한 마음이고…)
유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대하는데 무능한 것이다.)

내게 자꾸만 “내가 하고 말지”의 자세로부터 벗어나라는 nudge를 요즘 자꾸 경험하곤 하는데…
실천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

끊임없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특별히 그것이 지나쳐서 자신과 주변에 파괴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못한 채, 과대평가한 자신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 사람이 특별히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이 몹시도 마음이 아프다.

그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볼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tentatively 정리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절대로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정확하게 보게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2.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만이 과대평가라는 보호막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하는 뒤틀려짐(distortion)으로부터 그 사람을 끄집어 낼 수 있다.

3.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 사람과의 정직한 대화, 사랑의 포용, 질책이나 충고 등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내용에서,
1과 2는… 어떤 의미에서 내게 많은 위안을 준다.
결국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3의 항목을 생각해보면,
참 길이 막막하다.

어떤때 그 사람과 정직한 대화를 해야 하는지, 어떤때에는 지적보다는 포용을 해야 하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어떤 tone으로 충고나 질책이 필요한건지 등등…
참 많은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major battle이 3의 항목에 있지 않고, 1과 2의 항목에 있는 것이라면,
비겁한 회피일수는 있겠으나,
3의 항목을 접하면서 느끼는 답답함이나 frustration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도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것이고.

논리가 아닌 다른 언어를 배우기

늘 ‘논리’는 내게있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그 논리가 물론 완벽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으나,
적어도 그 논리의 틀 안에서 나와 세상을 이해하려고 최선을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논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방법일까?

마치,
한가지 언어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사람과 만나면 어려움을 겪는데…
그것은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사람이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논리, 혹은 체계적인 사고를 통해 세상을 분석 혹은 통합하려는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내가 잘 대화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른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논리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는
논리 없이 바닥바닥 우기는 사람,
지극히 직관적인 판단을 하면서 그것은 논리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
논리는 머리아프니까 그때 그때의 감성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 등과 같이.. 다소 비뚤어진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논리보다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
분석보다는 사랑이 우선이라고 여기는 사람,
내 논리의 틀로 사물을 분석해내기 보다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세계가 나를 분석해주기를 기다려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다시한번,
겸손함의 중요성을 느낀다. 

‘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살기

고등학교때부터 집을 떠나 살았다.
게다가 과학고등학교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사춘기 후반부를 보냈다.

내가 과학고에 다닐 때에는, 물론 그 중에는 공부를 잘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 이외에도 ‘별난 아이들’, 혹은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학고에 들어가는것도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다. 지금같으면, 나는 절대로 과학고에 못들어 갔을 것 같다. ^^)

일반학교에 갔더라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묻혀버릴만 한 애들이, 과학고라는 독특한 환경에 있었기에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우리학년 60명중 80% 정도가… IQ 155 이상이었고…
어찌보면 약간 ‘싸이코’ 들이 모여있는 것 같이 느껴질때도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과학고 아이들만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농담, 생각 체계 등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 전국에 4개 밖에 없는 과학고에서 비슷한 애들이 대학에 모였고,
소위 ‘일반고’ 애들도 그런 분위기에 흡수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야말로 out of nowhere에 딱 학교 하나 있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당구를 치기 위해서 금요일 밤에, 동네의 경운기를 타고 유성까지 나갔던 기억도 있다. -.-;)
일반적인 대학생활의 낭만 같은 것은 별로 없었는데,
대신 정말 ‘독특한’ 문화를 참 많이 경험했었다.

그야말로, 과기대 (그 당시에는 KIT 였다. 한국과학기술대학) 애들만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논리, 언어들에 더 익숙해져갔다.

그 이후,
대학원 역시 그랬고,
그 이후 2년+의 직장생활도 그 연속이었다.

이런 과정을 겪었으니,
NERD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문화와 생각 밖의… ‘정상적인 보통사람’의 논리와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더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들었던 충고들 가운데 가장 날카롭다고 느꼈던 것은,
‘너는 모든 사람이 다 너 같은줄 안다’ 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NERD들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학교에서 학부를 마친 내 아내 조차도,
내가 ‘극단적인 공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내 이런 background가,
때로는 내게 도움과 힘이 되기도하지만,
많은 경우 내 생각의 체계 안에 나를 가두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하는 것 같다. 

Would I….?

Fuller Seminary에서,
Stanley Hauerwas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강연의 비디오를 볼 기회가 있었다.
미주뉴스앤조이에 나온 기사를 보고 인터넷을 뒤져 찾은 것이었다.
(그의 책, Hannah’s child의 내용을 이야기한 것)

몹시 피곤한데도, 자정이 넘도록 그 강연의 상당 부분을 앉아서 들었다.

매우 심한 정신분열증을 가진 아내와 살아야 했던 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America’s Best Theologian이라는 title은,
그러한 고통속에서 잉태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보배가 삶에는 분명 있는 듯 하다.
만일, Hauerwas가 처음 결혼생활을 시작할때, 하나님께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진리의 파편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고통을 미리 알려주었다면 그는 그 고통의 길을 택했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고통의 길을 통해서만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겠다고 하신다면,
나는 그런 고통의 길을 선택하게 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런 속에서 일하시는, 그런 사람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그저 놀랍기만하다.

When Christianity is assumed to be an “answer” that makes the world intelligible, it reflects an accommodated church committed to assuring Christians that the way things are is the way things have to be. Such answers cannot help but turn Christianity into an explanation. For me, learning to be a Christian has meant learning to live without answers. Indeed, to learn to live in this way is what makes being a Christian so wonderful. Faith is but a name for learning how to go on without knowing the answers. That is to put the matter too simply, but at least such a claim might suggest why I find that being a Christian, makes life so damned interesting.
– Stanley Hauerwas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내가 여러가지로 건강할 때에는,
내가 해야 하는 것을 즐겁게 하게 되는데,

내가 여러가지로 건강하지 못할 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에 탐닉하게 되는 것 같다.

회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약 15% 쯤 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약 85% 쯤 하고 있다.

KOSTA 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약 5% 쯤 하는 것 같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95% 쯤 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해야하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하나가 되면 제일 좋겠지만,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은 듯.

하고 싶은 일보다 몇배나 많은 해야하는 일들을 해나가며,
그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일이…
하고 싶은 일에 탐닉하며 얻는 shallow한 것보다 훨씬 더 joyful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