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가 되는 것

약자가 되는 것은 참 마음이 무겁고 힘든 일이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고, 분노가 솟아오르게 되기도 한다.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감내해야하기도 하고, 불안감과 싸워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약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미 너무 강자여서…
그저 강자로 사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어쩌다 내가 약자로서 노출되게 되거나…
내가 약자가 되어야 하는 것을 유난히 더 힘들어 하는 듯 하다.

회사에서 사람들과의 사소한 대화 속에서 쉽게 자존심 상해 한다던가,
작은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불평한다던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저희의 것이다.

예수께서하신 이 선언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복이 있는 세상이 왔다는…
이제는 이전의 세계관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세상이 왔다는…
엄청난 것임에도,

오히려 내가 강하기에 그 선언의 깊이를 인식하고 살지 못하는게 아닐까 싶다.

Thanksgiving을 보내면서,
내게 감사가 사라진 메마름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불성실한 사람을 말씀 사역자로?

학교나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매우 게으르거나 성실하지 못하거나 부정직한 사람인데,
교회나 성경공부 모임 등에서는 많이 나서는 사람들을 가끔 접한다.

나도 물론 얼마나 내가 직장과 가정에서 성실한 사람인가 하는 반성을 스스로 지금도 많이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할때, 나는 정말 성경공부가 좋았다.
그래서 학교 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서 성경공부에 몰입한 기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빠지고 나니, 학교 생활을 다시 성실하게 하는 리듬을 되찾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그 이후 계속 허덕허덕 하다가…
그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야 비로소 겨우 회복을 할 수 있었다.

학교 생활이나 직장생활, 혹은 가정 생활에 성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사역을 강조하는 것은 그 사람을 망치는 독인 것 같다.
한번 그렇게 빠지면 회복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내 모습을 자주 점검해 보곤 하는데,
늘 그 균형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균형이 깨어진 사람들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프다.

나를 부끄럽게 한 우리 그룹 manager

지난 금요일 이었다.
아침에 우리 그룹 manager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제가 있는 장비를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내가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것 저것의 문제점들을 이야기했고,
우리 그룹의 manager는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내게 이런 저런 것을 물어보았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나는 그냥 퍼져서…
내 자리에 앉아서 data 좀 정리하고…
12월 첫째주에 있을 학회 invited talk 준비하고… 그러고 있었다.
(솔직히 가끔은 이렇게 몸을 움직여서 실험하고 하는 게 귀찮을 때가 있다. ^^)

그날… 저녁 7시쯤이 되었을때,
그 manager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내 자리로 왔다.
내가 이야기한대로 장비를 손봤더니 문제있던 장비가 안정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게 고맙다고…

어휴…
정말 부끄럽고 미안했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더 많고, 경험도 많고… 내가 하라고 지시하더라도 내가 뭐라도 할말이 없는 그런 입장인데,
이 사람은 자기가 금요일 저녁 7시가 되도록 저렇게 땀을 흘려가며…
내가 한마디 틱~ 던진 말을 가지고 그렇게 장비와 씨름을 했던 것이다.

정말… 정말…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우리그룹 manager가 존경스러웠다.

경제침체와 관련된 짧은 생각

내가 개똥철학을 펴는 것일수도 있으나…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사회의 체제, 사상의 흐름의 폭력성이 극에 달했을때,
바로 그때 교회가 복음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자주 그 빈자리를 다른 사상들이 채우려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 기독교가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 같다.

자유방임주의의 폭력성에 노동자들이 짓눌리던 시절,
서구 교회가 그것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주는데 실패한 자리를 공산주의가 차지했고…

좀 더 가까이에는…
한국의 소위 IMF 사태가 터졌던 90년대 후반,
한국 교회가 그 경제적 위기 속에서 외쳐야 했던 선포를 포기하자…
그 자리를 세속화와 물질주의가 차지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만일,
지금 이 경제침체/경제위기의 시기에…
교회가 특히 한국 교회가…
또다시… 기도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잘 풀어주실 것이다,
기도해서 위기를 성공으로 극복해라…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라… 는 식의 천박한 이야기만을 한다면,
한국교회는 좀 더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많이 암울하다.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

누가복음 2:29-30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늘 가슴 속 한곳에 채워지지않는 갈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 것 같다.
처음 신앙의 세계를 접했을때, 그동안 채우지 못했던 갈증을 채우는 생수와 같은 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아직 채워지지 않는 그 영혼 깊은 곳의 갈증이 있음이…
소망을 갖게 한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무엇을,
다시 되새기게 하신다.

Actor or Director?

예전에는, actor가 되고 싶었다.
실제 대학때 연극에 빠지기도 했었지만…

실제 삶에서도, 내가 무대위에 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director가 되고 싶어졌다.

내가 무엇을 하기 보다,
다른이들이 무엇을 하도록 가이드를 해주고 바운더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
방향을 제시하고 무대 뒤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즐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최근,
다시 actor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내가 금년에 들은 최고의 설교

지난 주말에는 보스턴에 가서, Grace Chapel의 예배에 참석했다.

나는 설교를 들으면서,
한편 마음을 면도날로 찢어내는 것과 같은 아픔을,
한편 막힌 것을 뻥하게 뚫어내는 것과 같은 시원함을,
한편 답답하게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명쾌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울었다. 마침 손수건을 가지고 가지 않아 마음껏 울수 없었지만… 정말 울었다.
생각 같아선 그 자리에 앉아 좀 더 울고 싶었다.

http://gc.reelworship.com/gc/audio/GC_111608.mp3

Grace Chapel은, 보스턴 근교의, 백인 중심의 town에 있는 교회이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들이 주로 다니고 있고,
‘목사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New England에서 든든하게 건강한 복음주의의 명맥을 지켜내고 있는 교회이다.

그런 context 속에서… 이 설교를 들어보라.

그런 대중들 앞에서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서도,
나는 이 교회와 목사님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미국내의 한국인들,
한국의 ‘주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내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다음 몇 문장들은 설교에서 따 온 것들이다.

Is the American church willing to just listen to Latin American brothers and sisters?
미국 교회들은, 남미의 형제 자매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기만 할 의사는 없는 건가?

Stop acting as if the salvation is in the hands of Americans.
마치 구원이 미국인들의 손에 있는 것 같이 행동하는 것을 그쳐라.

One of the biggest hindrances is the negative perception of the American Church
(세계선교에 있어서) 최대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미국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미지)이다.

Fellow believers around the world see the American Church as shallow, weak, and compromised.
전 세계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미국 교회가 천박하고, 약하고, 타협한다고 본다.

The American Church is more American than Biblical.
미국 교회는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미국적이다.

We have confused the Kingdom of God with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allowed individualism, materialism and pragmatism to poison the church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합중국과 혼돈해왔다. 그리고 개인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실용주의를 허용하여 교회가 독에 물들게 했다.

Do we have the courage to speak out to stand out in the face of an ever-more-corrupting culture?
우리에게는 용기가 있나? – 계속해서 더욱더 부패해가는 문화에 맞서서 소리치고 일어설 그런 용기가 있나

Do we have the discipline to cultivate a vibrant authentic spirituality?
우리는 살아있는 진정한 영성을 형성해 갈만한 훈련이 되어있나?

If we can’t capture the attention and  the imaginations of our neighbors across the street with our distinctive attractive life style, how will we ever win the respect our neighbors around the world?
만일 우리가 우리의 다르면서도 매력적인 삶의 방식으로 우리 이웃의 관심과 상상력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 세계 이웃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는가?

We are Christ-followers first, and then Americans second, and our brothers and sisters around the world want to know that.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후에 미국인들이다. 전 세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은 그것을 알기 원한다.

KOSTA-2009 주제문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Shalom of Jesus, Courage against the World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길을 걷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아무리 그 길이 가치 있고 소중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 길을 가는 일은 우리를 쉽게 절망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 밝은 결과가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더욱이 그 밝은 미래를 현재의 삶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면, 지금 가는 그 길이 아무리 어둡고 험해도 우리는 그 두려움과
싸울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 사는 일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기는커녕 바로 그 로마의 손에 잡혀 매 맞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일,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가서 친구가 되는 일,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일, 한 사람의 가치를 효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일, 원수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보다 그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일 등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모델이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가 선뜻 들어서기에 두렵고
좁은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두렵고 좁은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셨고, 우리에게도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가신 그 길에 담대하게 들어서라고 초청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 끝에 밝은 미래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 어둡고 험한 길을 가며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길이 승리의 길이라는
것,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명백한 증거는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바로 그 육체를 입고 다시 이 땅에서 부활하셨다. 생명이 사망을 이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만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 땅 위에 사셨다. 동시에, 예수를 왕으로 모신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을 입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할 모든 육체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그 길의 끝에 있는
밝은 결과, 그때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Shalom)’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시던, 하나님, 인간, 모든 만물 간에 창조질서가 완성된 모습이다. ‘평화’(Shalom)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미래에 있지만,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진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그 완성된 하나님의 ‘평화’(Shalom)를 경험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속에서 어그러진 질서와 그릇된
세계관에 대항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절대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혹시 있을 수 있는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이 끝이
아님을 알기에, 또 우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의도하셨던 완성된
‘평화’(Shalom)에 거할 것을 믿기에,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는 삶을 사는 가운데, 완성된 ‘평화’(Shalom)를 경험해 갈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그를 통한 ‘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KOSTA-2009 운동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를 알기 원한다. 세상이
비웃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이 땅을 사신, 또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한다. 결국에는
이 땅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평화’(Shalom)를 이루실 것이며,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그 완성된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를 경험하기 원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용기를 다시 추스르고자
한다.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 큰 불안으로,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잃어버릴 것에 대한 또 다른
불안감으로 사람들을 노예 삼는 어그러진 풍조를 향해 진정하고도 유일한 대안을 우리가 삶으로 보여주기 원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꿈을 잃어버린 세대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Shalom)안에서 우리는 다시 꿈과 이상과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을
선포하기 원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