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어제는,
저녁식사후 잠깐 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민우에게 복음을 이야기해주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전혀 소망이 없는 우리에게 십자가가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망인가,
하나님께서 민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 은혜를 얻은 사람이라면 죄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됨의 영광이 어떤 것인가.

나도 민우도,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떤 아버지가 될까

민우에게 어떤 아버지가 되는 것이 좋을까.

잘 이해해주는 아버지,
함께 장난치는 아버지,
사랑 많은 아버지,
지혜가 많은 아버지,
힘센 아버지,
든든한 아버지,
존경스러운 아버지…

이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기도하는 아버지”가 아닐까 싶다.

자녀를위해 무릎꿇는 일을 쉬지 않는 아버지…

Spiritual

그저께부터,
QT 본문이 에베소서이다.

에베소서 첫 부분은 구원의 영광에 대하여 다루고 있어,
그 내용을 많이 곱씹게 되었는데…

어제 아침 에베소서 1장 후반부 말씀을 묵상하고 나서…
뭐랄까…
내 영에서 막혀있던 무엇인가가 뻥 뚫린듯한 느낌이랄까…. 그런게 느껴지고 있다.
뭐 대단히 극적인 그런 건아니고,
그저 잠잠하게… 그렇지만 다소 선명하게 그런 느낌을 갖고 있다.

이게 계속 진행될 어떤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하루이틀짜리 경험으로 끝날지 잘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 어떤 영적도약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은사(gift)에 대하여

은사 = 그 사람의 장기(개인기) = 특기 일까?

최근에 베드로전서를 공부하면서,
이 은사(gift)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은사라는 것을 마치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시키기위한 자신의 role로 인식하고 있는 풍조 속에서…
그래서 숨겨져 있는 자신의 재능/은사를 발견해야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풍조 속에서…
그것에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가 이땅에 사는 목적은,
내 존재가치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현 세대의 기본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 나로서는…
은사를 그렇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매우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은사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은사는 어떤 사람이 잘 하는 장점도 아니고,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은사는 공동체 적인 것이고,
그리고, 매우 상황적인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령,
노래를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성가대를 하게 될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그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gift)은 노래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를 위해 자신에게 이 일을 담당시키셨음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단순히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자신은 그 일에 은사가 없다’는 식으로 대하는 이기적 개인주의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극복해야할 항목이 아닌가 싶다.

Resident Alien

보스턴을 떠난지 벌써 5년 반이 되었는데,
아직도 나는 Red Sox, Patriotis를 응원한다.

어제도 Patriots가 Steelers를 이기는 경기를 espn website에서 ‘문자중계’로 보면서 응원했는데…
(우리 집엔 TV도 없고 – 하나 있긴 한데, 안나옴 ㅋㅋ)

SF Giants가 world series 우승을 한 올해에도,
play-off에도 진출하지 못한 Red Sox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이땅에서 나그네된 삶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

Deism

Deism이란 신(神)이 세상(우주, 천지)을 창조하고나서, 그 세계는 기계적 원리에의해 움직이도록 놓아둔채, 그 세계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신관/세계관을 의미한다.

나는, Deism이란 유행이 지난, 옛날의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사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도 그렇게 Deistic한 관점에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려는 시도들을 많이 접한다. (내 자신에게서도 물론.)

– 하나님을 자신이 생각하는 기계적 우주/원리/원칙에 가두어둔채,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

– 나 자신과 나 자신을 둘러싼 삶의 영역, 좀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원칙들은 정해져 있다고 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데, 막상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구하지도 않고, expect 하지도 않는 자세.

–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역의 열매를 input과 output이라는 관점으로만 제한하는 자세.

– 내 머리속으로 시뮬레이션이 되지 않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

소위, 자신을 신뢰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이런 관점에 함몰되면, 스스로 그 관점에 갖혀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참 자주 본다.

복음의 영광도, 십자가의 은혜도, 하나님의 임재도…
자신의 framework에 가두어버리는…
심각한 reductionism(환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열정에 막혀있는 육체, 육체에 막혀있는 열정

끓어오르는 무한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 그 열정을 감당해내지 못할 육체(체력)을 가진 경우와,
끓어오르는 무한한 육체(체력)를 가졌으나 열정이 없어 그것을 발산하지 못하는 경우중,
어느쪽이 더 힘들까.

내가 어렸을때엔,
전자가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후엔, 후자가 더 힘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최근엔 다시,
전자가 더 힘든것이 아닌가 싶다.

다섯가지 사랑의 언어

인정, 함께함, 선물, 봉사, 육체적 접촉

내게 있어 순서는..

봉사 >> 인정 >> 육체적 접촉 > 함께함 >> 선물

이렇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렇게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고 행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랑의 척도도 이것으로 재단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

언제쯤 되면,
‘자아 중심성’이라는 유치함에서 좀 더 자유로와질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