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rated

존경하던 신앙의 선배가,
최근 많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그분이 그렇게 되었을까. 정말 내가 거의 20년전 부터 가장 존경하던 분중 한분이었는데…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분은… 자신이 정말 중요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계신것 같다.

물론,
그분은 매우 “중요한”분이시다. 그러나 자신이 중요함을 너무 깊이 인식하신 나머지… 자신의 생각 이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비뚤어지거나 잘못 되었을때 그것을 바로잡을 어떤 장치가 그분 내부에도, 그분을 둘러싼 주변 환경에서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스스로를 overrate 하고 계신 것이다.

최근…
나의 참 모습과, 나의 주변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 모습을 비교해보면서…
내가 아주 심하게 over-rated 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실제 내 모습보다 사람들이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도 자주  내 스스로를 overrate 하는 우를 범한다.

이런 내게,
진실한 꾸중이나 충고를 해주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그저 의미없는 out of context의 잔소리/충고를 남발하는… 그래서 오히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더 힘든… 그런 사람들과,
내게 좋은 이야기만 해주는 사람들에의해 내가 둘러싸여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지난 1년간,
내게 매우 의미있는 방식으로 내가 내 한계를 벗어나도록 나의 잘못을 지적해준 사람들을 꼽아보자면…
아무리 많이 생각해도 2-3사람 정도이다!
이런 상태라면… 흠….

열정과 욕심

열정과 욕심의 차이가 무엇일까.

얼핏 생각하면, 꽤 clear cut이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아보이는 것들이 많음을 본다.
건강한 열정으로 시작했다가도,
어느새 그것에대한 집착과 욕심으로 변질되는 것도 많이 보게되고…
열정으로 가장된 욕심으로 살아가는데도, 자신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어떤이가,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막상 그것이 열정이 아닌 욕심임을 나중에 알게 되면,
얼마나 그 자괴감이 클까.
내가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욕심이 아닌 건강한 열정임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까.
열정과 욕심의 경계에서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며,
내 삶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리더쉽에 있어…

건강한 리더쉽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 가운데에는,

보잘것 없고 형편없는 (혹은 보잘것 없고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는 것.
무책임한 사람들에 대하여 큰 인내와 포용을 갖는 것,
더디게 성숙하고 성장하는 사람들과, 묵묵하게 함께 해주는 것,
자신이 somebody라고 생각하는 허영에 가득찬 사람들 앞에서도 여전히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
efficiency를 추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때, 그것을 적절히 제압할 수 있는 것…

등이 아닐까 싶다.

사자 곁에 있는 고양이

어쩌다가,
고양이 새끼 한마리가 사자와 친구가 되었다.

사자의 용맹스러운 모습에 고양이는 매료되었고, 금새 그 사자와 같이 되고 싶어했다.
사자는 친절하게 그 고양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주었다.

사자와 함께 하면서 고양이는, 늘 사자가 사냥해오는 짐승의 고기 살점을 조금씩 뜯어먹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자신이 사자가 아닌 고양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었다.
사자가 물어온 짐승의 고기를, 잔뜩 폼을 잡고 물어 뜯으며 마치 자신이 그 사냥을 한 것같이 행동했다.

사자가 사냥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마치 그렇게 사냥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
사자에게, 자주.. 함께 힘을 합쳐 사냥 계획을 짜자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사냥에 관한한,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었다. 겨우 다람쥐 정도를 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자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고양이는 자신이 사자인양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나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자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사자는 일찍, 고양이에게… “너는 사자가 아니야”라고 일러주었어야 했다.

리더쉽은 때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자신과 같이 되지 말도록 권유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Leadership is an Art

Max DePree가 쓴 책인데,
이 책의 제목처럼… leadership은 art라는 생각을 최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강의를 통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being의 종합적인 것에서 나오는 art 라는 것이다.

나처럼 그림을 그리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처럼,
어떤 이들은 아무리 설명하고 도와주어도 그 리더쉽을 거의 픽업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 별로 많은 훈련이 없이도 마치 어린 독수리가 본능적으로 창공을 향해 나는 것 같이,
쉽게 리더쉽을 픽업하는 일을 보기도 한다.

삶과 사역의 많은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는 일이 참 크지만…
리더쉽의 부분은 바로 그런이유로 더 하나님께서 ‘보내주심’에 기대하는 요소가 큰것이 아닐까.

사람에 대하여 실망하기

막 신앙에 눈을 떴을때…

어쩌다 내가 존경하던 사람에 대하여 실망하면 깊은 실의에 빠졌었다.
아… 저 사람이 저럴수가…
조금씩 신앙이 성숙해가고 있을때…
어쩌다 내가 존경하던 사람에 대하여 실망하면 회의에 빠졌었다.
아니..저 사람마저 저러면… 도대체 믿을 수 있는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 후 좀 더 신앙이 자랐을때…
어쩌다 내가 존경하던 사람에 대하여 실망하면 sarcacism에 빠졌었다.
그래… 저 사람도 그럴줄 알았어.
아직은 갈길이 멀긴 하지만, 
요즘 내가 존경하던 사람에 대하여 실망하면 소망을 갖는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내가 저렇게 훌륭한 분의 한계를 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시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많은 것을…

자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contents를 쏟아부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것만 더 이야기해주면 이 사람들이 제대로 설 수 있을 것 같은…
이것만 더 가르쳐 주면 빠져있는 문제로부터 이들이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러나,
때로 그런 이들을 위해 사랑을 가지고 많은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될 수 있음을 배운다.

결국 스스로 설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버리는 것이다.

어른을 섬기는 일

가끔은, 나보다 나이많은 ‘어른’을 내가 섬겨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 어른이 물론 존경받을만 하거나, 나를 잘 이끌고 인도해줄 수 있는 경우라면 내가 기꺼이 그 관계를 누리며 지낼 수 있으나…
그 어른을 내가 ‘이끌어야’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어른을 이끌어야 하는 경우에도 크게 두가지의 경우가 있다.
첫번째는 그 어른이 나로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있을 경우. 이럴 경우에는 내가 그분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섬기면서 무례하지 않게, 그러나 때로는 단호하면서도 직설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번째 더 어려운 경우에는 그 어른이 나로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없거나, 자신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혹은 나이어린 사람으로로부터 인도함을 받는 것을 ‘위협’으로 느끼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엔 참 여러가지로 힘들다.

많지는 않지만 내가 이런 두번째 경우에 빠졌을 경우에는, 나는 그냥 손을 들어버렸던 것 같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며 포기했다.

최근,
내가 존경하는 어느 선배님이 이런 상황에서 어른을 겸손히 섬기면서, 지혜롭게 대화를 하면서, 결국은 그 어른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어른에 대한 존경/존중과, 지키려는 진리에 대한 확신, 그것을 겸손하게 present 하는 자세,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모습, 그리고 결코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하고 매달리고 품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자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열정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도,
테그닉으로 이루어 지는 것도,
연륜으로만 만들어 지는 것도,
지식으로 세워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태산과 같은 사람

최근, 한국에서부터 알고 있는 어떤 선배가 크게 실망스러운 일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이 선배를 A 선배라고 하겠다.)

A 선배보다는 후배이지만 나보다는 선배인 B 라는 선배가 그 A 선배의 잘못을 수습하면서 A 선배와 대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나는 B 선배와 이메일과 전화로 연락하면서 어떻게 A 선배와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 왔는데…

최근 며칠동안 B 선배가 전화도 잘 받지 않고 이메일 연락도 뜸 한 것이었다.

지난주말… B 선배가 내게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다.

오승 형제님,
그냥 몇 자 나눌 것은…
사실 A 선배님은 제겐 태산과 같은 큰 분이셨는데
그 산이 무너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영적 침체랄까 그런걸 겪고 있습니다.
아무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은 그런 심정 말입니다…
전화 응답을 제대로 못드려서 미안합니다…
정말… 지금 심정은… 그렇습니다…

나는 B 선배의 이 이메일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 정말 한참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흐느꼈다.

그리고…
나는 B 선배에게 이런 이메일을 보냈다.

B 선배님,
제게는 B 선배님께서 태산과 같은 분이십니다.
B 선배님께서 힘들어하시는 그 모습이 오히려 제겐 큰 용기와 위안이 됩니다.
늘 그렇게 제게 태산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역시 그 A 선배로 인해 몹시 마음이 무거운 상태로 몇주째 보내고 있지만…
그러나 A 선배를 보며 그렇게 아파하는 B 선배의 마음에서 소망을 본다.

야전 사령관과 훈수쟁이

Spiritual leadership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다 보면,
자신이 이런 저런 결정을 하고 자신이 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결정을 따르도록 도우며 함께 나아갈일이 많이 있게 된다.

그런데,
적어도 나는, 너무나도 자주…
그러는 과정 속에서 내가 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훈수를 두고 있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훈수를 두는 사람은, 그 경기의 승패에 큰 관심이 있다거나, 그 경기에 임하는 사람에 큰 관심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저 훈수를 두는 재미를 즐기는 것이다.
또한 훈수를 두는 사람은 그 경기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
훈수를 두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수를 읽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중심 생각이 있다. 다시 말하면 매우 자기 중심적인 것이다.

그러나,
야전 사령관은 다르다.
야전 사령관은 현장에서 함께 땀흘리고 함께 뛴다.
그 전투의 승패에 궁극적 책임을 진다. 그 전투에 임하는 사람에게도 깊은 관심을 쏟고, 그 사람들이 가져오는 크고 작은 승리와 패배의 소식에 깊이 귀를 기울인다.
야전 사령관은 자신이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는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다.

내가 사람들과 모임들을 섬기면서,
훈수쟁이가 아닌 야전 사령관이 되도록 지켜주는 핵심적인 key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요즈음, 그 핵심을 ‘기도’라고 생각한다.
영적인 부담이 너무나도 크고 무거워서 그 영적 부담만으로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하는 기도.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 처럼, 땀이 피가되도록 절실하고도 간절하게 하는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