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 주제 미팅

지금은…
KOSTA/USA-2009 주제 선정을 위한 시니어 간사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DC에 와 있다.

96년부터 KOSTA에 참석해 오면서… 98년 부터 KOSTA에서 이것 저것으로 단순 노동으로 섬기면서…
단 한번의 모임도 내가 무엇인가를 깨닫거나, 배우거나, 새롭게 하거나 하지 않고 돌아간 모임이 없었다.

KOSTA는 내게 참으로 특별하다.
내게 풍성한 많은 것을 공급해 주면서, 내가 헌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다.

이제는…
후배 간사들을 참 많이 생각하게 된다.
10년전 어리버리한 내가 KOSTA에서 무엇인가를 돕고 싶다고 그렇게 뛰어 든 이후 상상할 수 없었던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듯이,
후배 간사들에게도… KOSTA가 그러한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내 커다란 책임 가운데 하나인 듯 하다.

운동체 (안상현)

맥스 드프리의 “권력없는
리더쉽”(Leading without power)에서 운동체에 대한 부분이 많은 통찰을 제공한다. 내가 섬기는 곳은 다
운동체임을 유난히 강조하는 곳이다. 크리스챤이면서 유능한 경영자요, 또 많은 비영리 단체의 리더쉽으로 활동한 저자의 경륜이
엿보인다.

“운동체란, 미래는 그저 겪으며 인내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창조할 수 있는 것임을 모두가 공통으로 인식하는 집합적인 정신 상태다.”(p. 27)


운동체에서는, 굉장했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또한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와 뜻밖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들의 교육방식이다. 그들은 과거를 간직하고 기억하는 방편으로 이야기를 한다.
운동체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번창한다….. 이야기들은 운동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야기 자체가 우리의 뜻을 표출하는
수단이 되며, 억지로 무엇을 강요하고자 하는 유혹을 크게 감소시켜 주기 때문이다.”(p. 28)

“운동체에서는, 이야기들이 그 단체에 생기를 주는 반면, 보통 단체에서는 이야기들이 사람을 조작하는 역할을 한다.”(p. 33)

“운동체가 지닌 매력 가운데 하나는 관료적인 것보다 실체에 더 확실하게 헌신한다는 것이다.”(p. 30)


운동체의 놀라운 측면 중의 하나는 자유로움 가운데서도 잘 훈련된 일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운동체가 그저 하나의
조직체로 뒷걸음질치는 경향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에는 몇 가지 징후가 있다. 즉, 그 경우에 사람들은 이해 득실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하며, 모호함보다는 편안함을 선호하기 시작한다. 또 도전보다는 통제를 찾는다(독특성보다는 일반성을 다루는 것이
언제나 더 쉽다). 개인의 은사를 존중하기보다는 업무 분장을 더 신뢰하기 시작한다.”(p. 31-32)

“운동체는
리더들이 그 집단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책임지도록 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을 때 아픔을 겪는다. 리더들만이 집단 전체에게 스스로와
다른 집단들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운동체는 또 하나의 그저 그런 단체로 되어
버리고 사기가 떨어져 운동체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다. 운동체를 위하여 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때, ‘사람은
그가 되어 가는 모습(who we become)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라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진리를 상기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p. 34)

http://sssam95.egloos.com/174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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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현 간사님의 블로그에서 가지고 왔는데…
얼핏 이렇게 보면 그래도 우리 코스타 간사들을 아직까지는 건강한 것 같기도 하고…..

조직은 그냥 가만히 두면 근본주의적 원리가 강화된다 (이정희)

조직은 그냥 가만히 두면 근본주의적 원리가 강화된다. 근본주의적 원리가 조직을 운영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에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런 방향으로 원리를 수렴시키는 것을 쉽게 있다.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조직을 운영할 대응 조치를 취할 기제를 조직 내에 만들어놓지 않으면 그런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다양성이라는 , 리더쉽이 미리 계획하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담보하려는 정책을 취하지 않으면 눈덩이가 아래로 굴러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조직운영의 방식은 근본주의적 원리로 수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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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지금의 코스타도 그런 상황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많이 된다…
가끔은…


떤 단체나 조직이 그 단체나 조직의 생각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곁에서 안타까워하는 일들이 있는데, 어제 몇분들과
밤에 conference call을 하면서… 지금의 코스타가 그런 오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싶었다.

이 시대에 바른 길로 –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 The Way to Live – Thy Kingdom Come (KOSTA 2008 주제문)

이 시대에 바른길로 –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The Way to Live – Thy Kingdom Come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10, 개역개정판)

세대는 세계화, 포스트 모더니즘, 뉴에이지 등의 영향 아래서 절대적인 기준점을 잃어버린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극단적으로 상대화시킨 세상은 개인의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할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지만, 우리는 오히려 불안과 욕망의 노예로 우리 자신들을 전락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물신주의는 돈으로 모든 가치를 집결시켜 마치 바벨탑을 쌓았던 시대처럼 모든 사람들을 영향 아래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이제 돈과 물질은 삶의 안정을 약속하는 신앙이 되어버렸다. 돈의 영향력은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여져서 자체가 선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은 쉽게 정당화되었다. 조국의 현실도, 디아스포라의 삶의 현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교육은 안정된 직장을 갖으려는 방편으로 전락해 버렸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피교육자의 인격도, 인간, 사회, 자연, 역사에 대한 책임도, 서로 함께 살아가는 삶도, 그에 따른 삶의 의미도, 또한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오직 돈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물질적인 안정과 풍요로운 삶을 쟁취하고 지키는 것이 (The Way to Live)’ 되어버렸다. 성공과 생존을 위한 모든 노력이 정당화되고 칭송되었고, 현실을 극복해내는 이상과 물질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 그리고 그것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조롱거리가 되어 버리고 있다.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고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참된 길을 가지 못하는 세대가 지금 세대가 아닐까?

이러한 세속화와는 반대로, 이원론(dualism)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기독교를 생명력을 잃어버린 종교로 변질시켜 버리는 일들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종교활동을 제외한 세상 속에서의 모든 활동을 속된 으로 규정하며 세상과 분리된 종교활동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사명을 망각하며 사는 모습은 우리 안에 발견되는 다른 극단의 모습이다. 어떤 이들은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이원론적인 삶을 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현실의 도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러한 삶의 자세를 이용하기도 한다. 경건함과 거룩함을 내세우며 종교생활에 매달리지만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에 실패하고 그저 격리와 회피의 삶을 사는 비복음적 삶의 자세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로부터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세대는 목말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대의 흐름에 무기력하게 끌려가면 갈수록 진정한 갈망하고 있다. 초자연적인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세계적인 추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영혼 내부의 외침이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는 현실은 목말라 하는 세대가 자신들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그들이 살아가야 길을 제시하기를 기대했던 기독교로부터 받은 배신감 표현이다. 목마른 세대의 갈증을 채워주기에 대부분 기독교인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원론적 사고에 빠져 현실을 등지고 예배당 안에서 자신들만의 천국을 구축하느라 바쁜 나머지 예배당 밖에서의 능력을 상실했거나, 세상의 모습을 본받아 신앙을 정서적인 영역에만 제한시킨 성공과 정복의 이념으로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세속화와 이원론, 가지 극단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바람직한 모습으로서의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같다. 세상보다 효과적으로 세상의 길을 추구하는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이 기독교에 돌을 던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땅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땅의 가치를 초월해서 영원을 갈망하며 살고, 한편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면서도 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균형을 어디에서 찾을 있을까? 비복음적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해답을 누구에게서 찾을 있을까?

이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둠 가운데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고 살아내고자 땅에 오셨다.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서 드러나는 삶이었다. 안에서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통합이 있었고 그의 삶에는 세상과 앞으로 세상의 통합이 있었다. 오직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삶이었다.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 생명 없이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새로움 패러다임이었다. 세속화나 세상과의 분리가 아닌, 초월적 가치와 치열한 삶을 통합시키는 가치였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고, 그런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

우리는 KOSTA 2008 통하여 바르게 삶을 살아갈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했음을 선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이 아니고는 추구할 기초가 우리에게 없음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성령의 일하심으로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성령의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함을 보게 되기를 원한다. 또한, 소망을 잃어버린 시대 속에서 땅에 살면서도 영원을 추구하고, 초월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땅의 삶에 충실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그리고 세상이 목말라 하는 임을 깨닫기 원한다. 세상과 대적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는 눈이 열리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자 세상을 거슬러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구름과 같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이들로 말미암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 확장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그 길’을 보게 하시고, ‘그 길’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허락하시며, ‘그 길’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KOSTA/USA-2007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KOSTA를 섬기다 보면, “KOSTA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KOSTA를 만난지 12년째가 되는 필자로서도 어떤 의미에서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KOSTA란 무엇일까, 무엇이 KOSTA를 KOSTA 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위해 딱딱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넘기며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내용을 정리해보았을때 사람들이 흔히 KOSTA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매우 다른 KOSTA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KOSTA는 집회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KOSTA

많은 사람들이 KOSTA를 여름에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에서 여는 집회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KOSTA가 원래 추구하고 있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KOSTA는 집회를 포함한다. 그러나 KOSTA는 집회라기 보다는 KOSTA의 핵심가치(core value)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만드는 운동(movement)이다. KOSTA가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 규정(describe)하는 것은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다고 우리가 믿는 소망의 내용때문이다. 만일 KOSTA가 많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일회적인
집회를 통해 소부흥(mini-revival)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KOSTA는 집회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KOSTA가 꿈꾸는 것은 KOSTA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이, (1) KOSTA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에 동의하게
되어 (2) 그 핵심 가치를 가지고 각자의 삶에 살 뿐 아니라 (3) 그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4) 그러한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고 (5)
그들이 몸을 담고 속해 살고 있는 피조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름에모여서
함께 하는 집회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KOSTA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KOSTA, 2007년에는

집회를 앞두고 왜 갑자기 집회가 아님을
강조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금년 주제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금년
KOSTA/USA의 주제는 “이 세대롤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이다. ‘변화(transformation)’가 금년의
키워드이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변화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성령의 일하심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을 조차도 대량생산하고 싶어하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덕(virtue)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집회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완전한(complete) 변화를
경험할 수 있으면 참 감사한 일이겠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코스탄들이 진정한 변화가 얼마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진정한 변화가 어떤 이들에게는 시작되는, 어떤 이들에게는 한단계 큰
도약을 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새롭게 갱신(renew)되는 일들이 있기를 기도한다.

건강한 혼란과 무질서를 기대하자

집회를 전후하여 이번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의 집회에 참석하는 코스탄들에게는, 결단의 기도 이전에, 뜨거운 찬양 이전에, 감격이 있는 말씀 이전에 올해의 주제를
붙들고 고민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고민의 시작은 바로 혼란과 시작되어야 한다. 혼란은 무질서이다. 혼란은
불확실성이다. 혼란은 미확정이다. 혼란의 상태에서는 아무런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혼란은 좌절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그런 혼란이 필요하다. 이런 혼란의 상태는 이 세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들 자신의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한 첫 삽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변화의 열매를 맺기 위한 씨앗이 되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창세기 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니)의 혼란이 있어야 1:3 이후의 창조의 열매가 있는 것이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열매와 결단으로 연결되는 집회가 되었으면 한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마음과 창조와 질서로 끝맺음을 하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넘어서는 집회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 진다 하더라도 그저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들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우리가 예상한 것들만이 일어나는 집회라면 그것은
진정 우리가 바라는 집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의 예측과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을 너머서 더 크게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대한 기대감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이 집회의
주인공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진정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를 갈망하고,
그러한 변화에의 길에 들어서서, 다른 이들과 전 피조세계를 그 변화로 이끌어내는 KOSTA/USA-2007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이, 이번 집회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어나길 기도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 Not to Be Conformed But to Be Transformed (KOSTA 2007 주제문)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Not to be conformed but to be
transformed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는 2007, 우리 민족은 100 전과는 비슷하면 서도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분단된 조국은 세계 여러 나라의 무자비한 세력 다툼과 세계화의 거센 바람에 둘러싸여 있고이로 인해 조국과 민족의 생존과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오늘날 우리 민족은 평양 대부흥 무렵의 어두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적인 시각으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우리가 두려워해야 것은 시대 우리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비복음적 가치관임을 깨달을 있다.  자본주의적 물질주의는 이미 세계를 제패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해 버린 하다.
세속화와 이분법(dualism)적인 사고, 그리고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도도한 물결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까지도 삼키려 들고 있다.
통계 숫자상의 그리스도인은 많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이는 많지 않다.  능력과 비전은 많이 이야기되지만, 경건의 진정한 능력, 욕망으로 오염되지 않은 참된 비전은 찾아 보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위엄과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고, 존경의 대상이 아닌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제 이상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민족의 희망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물질적 풍요는 시대 청년들의 영적 벌거벗음을 가리고 진리를 향한 간절함을 앗아가 버렸다.
세계화와 무한 경쟁의 도전 앞에 시대의 청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포기한 , 앞의 생존을 위한 두려움의 노예, 또는 끝없는 탐욕의 노예로 팔려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진정한 위협은 주변 국가들과의 정치적, 경제적 긴장이 아니다.
조국의 정치 경제적 불안정이나 분단 상황 속에서의 위협도 아니다이러한 것들이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두렵게 하지만, 우리가 싸워야할 주된 전투는 아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을 두어 싸워야할 전투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그릇된 가치관과의 싸움이다.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진리를 알지만 진리대로 살기보다는 세상의 가치관에 힘없이 끌려가도록 만드는,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우리 민족과 한인 디아스포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왜곡된 가치관에 의해 지배받고 신음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이다.

어둠의 세력과 싸울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가 진리로 시대의 흐름에 도전하며 시대의 헛된 모습들을 폭로하고 진리를 삶으로 드러내보일 것인가복음이 예배당 안에만이 아니라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여줄 사람들은 누구인가?
무너지지 않을 듯이 견고해보이는 세상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것을 무너뜨릴 사람들을 어디에서 찾을 있을까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능력이 되고, 유일한 소망이 된다는 것을 보여줄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너희는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비복음적 시대정신에 정복당한 세대에서 다시 진정한 희망을 외칠 있는 유일한 사람들, 그들은 바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이요,
진리로 인해 변화된(transformed) 사람들이며,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속과 경건의 이중적인 삶을 사는 종교인이 아닌 성령과 진리로 인해 온전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다절대진리에 든든히 서서 세상을 거스를 있는 능력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세상이 감당할 없는 사람들이다하나님은 이들을 사용하셔서 세대를 꾸짖고 심판하며 당신의 공의를 드러내실 것이다.
이들이 있는 곳에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 견고해 보이는 어둠의 세력이 무너지는 기적이 임할 것이다.

우리는 KOSTA 운동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한다.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와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엎드리기를 소망한다.
100년이 넘는 한국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령께서는,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분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은혜를 받도록 일하셨다.
이제는 우리 민족과 한인 디아스포라를 예수의 참된 제자로 변화시켜서 시대, 세계를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간구한다.
그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 민족 아니라 세계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한다진리에 의해 온전히 변화된 우리 한민족 디아스포라 청년들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세상을 복음으로 바꾸어 나가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KOSTA 2007에서 시작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gpKOSTA-UT

Thanksgiving 휴가 기간 (25-27일)동안
Utah 에서 gpKOSTA를 합니다.
gpKOSTA는 지역의 학생들 leadership training program 입니다.

Utah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몰몬들이 ‘성지’로 여기는… 몰몬의 주(state)입니다.

정말 영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야말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알고 나서…
제 마음 속에서는 깊은 부담과 애정이 생겼었습니다.

대도시가 아니므로,
많은 resource를 접할 수도 없고,
한국 사람들이 많아서 좋은 Korean Christian community를 구성할 수도 없고,
학생들도 잠시만 있다가 떠나기 때문에 정착해서 학생들을 복음으로 섬길 여건도 열악하고…
게다가 주위의 몰몬들에 의해 intimidate 될만한 환경.

이번엔,
제가 그쪽에서 organize 하는 것을 KOSTA contact person이 되어서 돕고,
가서 강의도 하고 여러가지로 섬기게 됩니다.

현지의 학생 준비위원들이 정말 열심히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 정말 얼마나 제 마음을 깊이 움직였는지 모릅니다.
퀄리파잉 시험을 앞두고도 대표로 섬긴 자매님을 비롯해서…
힘든 중에도 교회들을 다니며 홍보하고,
fundraising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참석을 독려하고…
그리고 기도하고.
새벽 시간이 되도록 함께 전화를 붙들고 기도하면서 고민하고…

하나님께서 Utah의 이 소중한 형제 자매들을 향해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저는 알수 없지만,
이분들이 이번 gp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기대를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gpKOSTA는,
보통 지역마다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지역교회, 캠퍼스 모임의 리더들을 훈련시켜주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지역 모임인데요…

KOSTA를 섬기는 제가 보기에,
gpKOSTA에 ‘투입’되는 분들은… 정말 KOSTA가 가진 최고의 resource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령 이번에 함께 가서 말씀으로 섬기실 간사님들은
그분들이 제게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제가 그냥 믿을만큼 제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하는 분들입니다!
다들 소중한 thanksgiving 기간에 가정을 포기하고(^^) 학생들을 섬기려는 마음으로 가시죠.

불과 40여명의 학생들이 모이는 수양회를 위해서,
KOSTA의 ‘드림팀’이 투입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낭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합니다.

눈에 보이는 파급효과로 봐서야…
대도시에서 사람들 많이 모으고,
찬양팀 빵빵하게 조직해서 집회 하는 것이 훨씬 더 크겠지만요…

이렇게 resource가 낭비된다고 보여질만큼
하나님께서는 각 지역의 학생들 한사람 한사람에 말 할 수 없이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모르지요,
이번에 섬기게 되는 형제 자매님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더 행하실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잠깐 시간을 내어서… 30초만이라도 gpKOSTA/UT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http://gp.kosta.ws 로 가시면 자세한 정보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KOSTA/USA-2004를 다녀와서

지난 한주동안 코스타에 다녀왔습니다.
이번이 여덟번째 코스타였으니… 이제는 제법 여러가지 일에 익숙해지기도 할만도 한데… 여전히 제게는 새로운 깨달음과 많은 숙제거리를 제공해준 코스타 였습니다.

1. 이번에 사실 저는…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많은 기도를 하지 못한 채 코스타에 참석했습니다.
이 말은… 예를 들면… 마라토너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연습을 별로 하지 못하고 참석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가수가 콘서트를 하면서 노래 가사를 외우지 못한 채 무대에 선다는 것 이상으로 ‘엽기’임을 압니다. 그래서 더더욱 제겐 마음의 부담이 큰 코스타 였습니다.

2. 그와는 달리 코스타에 현지에서 기도는 대단히 energetic 했었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powerful 했던지… 영적으로 매우 둔감한 제게조차도 그 힘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3.
코스타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사람가운데 하나로서, 제가 성실하게 코스타에 임하지 못한 여러가지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여러군데에서 프로그램이 원래 의도하지 않은대로 진행되는 것이 감지되었고, 전체 집회를 비롯해서 곳곳에서 발을 동둥 구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일의 대부분은 ‘기획’의 미숙에서 나타난 것들이었습니다.

4.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새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60명에 가까운 해외 선교 헌신자들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했다고 고백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죄를 기도중에 쏟아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저 눈물을 펑펑 쏟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번은 집회 중에 맨 뒤에 서서 눈물을 흘려서… 제 신발이 젖을 정도로 울었습니다.

5. 매년 코스타를 섬기면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준비하는 사람의 미숙함과 그 부족한 그릇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실속’을 챙기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이번 코스타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던 것 같습니다.

것은 아마도… 코스타를 준비하며 섬기는 저같은 사람이야 말로 정말 하나님의 touch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섬김위에 당신의 은혜로서 넘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치 작은 간장 종지위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은…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섬김의 부분을 더 연구해서 채우는 일들은 계속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코스타를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주시는 것 같습니다.

7.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년에도 저는 코스타에 참석 하겠지요. 참석해서 하루에 3-4시간씩 자면서 땀 범벅이 되어 뛰어다니겠지요. 또 다시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겠지요.
그러나, 내년에는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8. 그리고… 아마도… 제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코스타 기간 중이 아니고 코스타가 끝난 후의 제 삶의 모습에서 더 잘 드러나게 되겠지요.

기독유학생의 엘리트주의

유학을 한다는 것,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 자신을 던져 더 나은 학업환경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험을
감수하는(risk-taking)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을 나온 유학생들 가운데에서 그러한 모험 감수(risk-taking)를
하고서도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나선, 적극적, 진취적, 모험적 엘리트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허들을 뛰어 넘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성향을 가진 유학생들이기에
그들이 보이는 삶의 방식과 태도도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 그것은 그들이 매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며 행동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학위’로 상징되어 질 수 있는 어떤 ‘성공’을 바라보지 않고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에게 이러한 모험 감수는
그 자체로 절대로 매력적인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이들의 삶의 방식은 매우 자주 그리스도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든 유학 생활 도중에 만난 사람이건, 이미 유학을 오기 전에 그리스도인이었건 간에 이들의 신앙
행태는 매우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회심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질이나 성품
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러한 기질과 성품도 분명히 ‘거듭나야’함을 생각해 볼 때 유학생들의 일반적인
신앙의 모습들은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목표 지향적 자세의 문제

긍정적인 목표
지향적 자세의 모델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빌립보서 3:14)을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표 지향적인 자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어디에서
기인했느냐, 그리고 그 목표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거의 모든 기독 유학생들의 ‘목표’는 비기독 유학생들의
목표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저 ‘공부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허울 좋은 합리화를 한다는 것을 굳이 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목표 지향적 자세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목표를 학문적/직업적 성취로 설정해
놓고 있는 유학생들에게 신앙 훈련/신앙 교육의 필요를 인식시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유학생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신앙 훈련이나 성경공부도 자신의 목표를이루는 장애물로 여기지기 십상이다.

2. 성공 지향적 자세의 문제


역시 소위 ‘성공’에의 기준과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세의 건강함 여부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경우에도 세속적 가치관에 근거한 성공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공 지향적 자세들이 유학생들과 같은 소위 ‘엘리트’ 그리스도인
사이에 편만한 듯 보인다.

대부분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노력(성실함)과 성공(성취)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 하지만, 모든 성실함이 언제나 성공으로
이끌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노력을
했음에도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한 사람들은 실패자이자 낙오자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소위 ‘고지론’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기도와 믿음으로 담대히” 물리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3. 행동 지향적 자세의 문제

“40
일 금식기도 3회” 어느 ‘부흥사’의 명함에 이런 ‘경력’이 써 있었다고 한다. 40일 금식기도를 몇번 했다는 것이 신앙의
이력에 들어가는 것도 우습거니와, 어떤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로 판단되는 모습은 더욱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소위 ‘엘리트’ 기독 유학생들 사이에 너무나도 많이 발견되는 모습들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것들은 해야지’
하면서 여러 가지 신앙의 행동들을 시도해 보는 모습들. 그래서 흔히 ‘헌신’의 핵심을 ‘행함’에 두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너무나도 자주 눈에 뜨인다. 지역교회에서도 당장 이처럼 눈에 띄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여기기
마련이고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진정으로 이르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되고, 고갈이 되고, 상처를 받게 된다.

금년 코스타의 주제를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로 잡은
것은 어찌보면 매우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유학생들의 성향에 매우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비정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기독) 유학생들의 흐름이 이번 코스타 한번으로 완전히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다소 비상식적인 낙관적
기대이겠으나,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이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유학생 문화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언급한 유학생들의 문화 속에서 상처를 받고 고갈된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풍성한
“치유”를 경험하는 일들이 있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크게 일하실 코스타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에 실렸던 글입니다.

내가 본 한국 교회, 내가 본 코스타 (우종학)

*이 글은 코스타의 웹진인 이코스타(www.ekosta.org)에
2001년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내가 본 한국 교회, 내가 본 코스타

To generalize is to be an idiot. – William Blake

1.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 신병 교육대와 전투지


떤 분께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정신에 반하는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을때, 그것이 윤리의 문제이든,
문화의 문제이든, 가치의 문제이든, 그 문제에 대해 기독교적인 목소리를 낼수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는(cf. 김연종 ‘흔들리는 한국 교회’). 나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반기독교적 흐름을 상대할
기독교적 파워가 없다는 게임의 논리에서도 그렇지만 ‘아군’이라고 분류하는 한국 교회의 정체성 자체에 대해서 의문이 가기
때문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잘 모른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한 관측적 사실은 한국 교회의 성장 또는 그 규모와 한국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 사이에 별다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안점식, ‘한국 교회와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 이러한 현상은 교회 성장주의,
유교적 권위주의, 기복주의(박성호, ‘한국 교회 그렇다면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등과 감성적, 개인적 성향에 맞춘 교회의
목회 전략, 사회에 대한 교회의 침묵(권오승, ‘세상으로 복음의 영광을 주목하도록’) 등, 쉽게 관측되는 요인들에 의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요인들 위에, 혹은 이런 요인들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며, 위에서 지적된 요인들을 극복하는 교회
개혁으로만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현장의 기독교인’의 부재이다.
반문화(counter-culture)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적 경향이 많은 한국 교회 안에
짙게 깔려 있음으로 인해 교회의 안과 밖을 철저히 나누고 교회의 벽을 높이 쌓는 이원론적 경향이 팽배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현장의 기독교인’들을 사라지게 만든 근원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cf. 정진호, ‘부흥을 가로막는 장벽들, 이원론의 문제를
진단한다-(2)’). 1920년대 미국에서 세속 문화에 대한 대항으로 일어났던 근본주의운동의 경향이 복음주의권 안에도 깊이
들어와 미국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은 90년대의 미국 복음주의권에서도 넓게
논의되었던 이슈 중 하나였다 (Mark Noll, ‘The Scandal of the Evengelical Mind’).


는 ‘신병 교육대와 전투지’의 비유가 ‘왜 현장에 그리스도인이 없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강제 징집이 아닌
사랑과 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들의 삶에서 치열하게 시작될 영적 (지적·감성적·의지적)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말씀 안에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교회는 그들을 ‘신병 훈련’으로 돕는다.

이제 신병 교육대에서 기초 훈련을
마친 그리스도의 전사들은 가끔씩 (한 주에 한 번이든 세 번이든) 후방으로 돌아와 쉼을 얻기도 하고 사기의 재충전을 받기도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들은 전방, 전투지에서 그들의 대부분의 삶을 보내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기본적인 신병 훈련 외에 실전에서 사용될 전투 훈련을 받은 적이 없이 홀로 전투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부정과 미움, 하나님의 질서를 반하는 어그러짐으로 물들어 있는 직장, 인간 관계, 사회 구조, 문화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장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공격은 그들의 삶이, 우리의 일이 예배가 되지 못하게 한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해 가는 것만해도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들이 배치될 전선의 부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들보다 먼저 전선에 들어와 실전을 통해 전투 능력을 갖추고 있는 각 분야의 그리스도인 전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에게 전선의 상황을 알려 주고 공격 목표를 주지해 주며 전술을 가르치고 함께 작전을 펼치는 소대장, 병장들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제한된 판단으로는 현장에 대한 부르심에 뜨겁게 헌신한 소수의 정예들은 고전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전사들은 혼자서 살아남는
일에 급급하여 숨어 있으며 그나마 뜨거운 열정을 가진 전사들은 도로 신병 교육대로 돌아가 버렸다. 세상 일에는 흥미를 잃은
반면에(김연종 ‘예수 이름으로 가진 병’) 신병을 모으고 교육하는 일이 그래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채워 줄 수
있으니까. 전선의 병력이 정예 부대여야 하고 다수여야 하는데, 내 눈에는 몸집 큰 신병 교육대만 보인다고 하면 과언일까?
신교대는 커진 몸집을 굴리느라 더 많은 교관을 필요로 하고 그러다 보면 전선으로 나오는 전사들은 당연히 적어진다.


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커지는 만큼 전선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병 교육대만 커진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교대인가? 교회가 커지는데 사회가 그대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사회
속의 그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가를 되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만일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이고 각양의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현장에서 주님의 가르침 대로 하나님의 질서 대로 살고 있는데도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앞서 가는 우를 범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겠지만, 현재의 내 좁은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만은 않는다.

나는 또한 현장의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으로 교회의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목회
전문가로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도들이 자랄 수 있도록 도우며 교회 공동체와 예배를 통해 끊임 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으로 재충전 시켜주는 일이며 이것은 타락된 창조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투는
실전 경험을 통해 전선에서 배우는 것이기에 신교대에서 해 줄 수 있는 훈련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현장의 문제들이 교회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투지의 그리스도인들의 전투 경험이 신병교육 훈련의
내용에 보다 많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의 문제들에 대해 현실적으로 다루고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캠퍼스 선교 단체에서 학부 시절 뜨겁게 헌신하던 리더들이 졸업 이후에는 대형 교회의 대예배 좌석에 숨어 버리는
일도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영혼의 성장을 돕던 리더십이 부정과 악이 팽배한
직장에서 통전적인(wholistic)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교회는 전사들을 소총으로 무장시켜 개인적으로 전선에 내보내는 무책임함을 넘어서 이들이 현장의
그리스도인들과 연결되도록 구조적으로 도우며 전선의 전력 증가를 위해 신교대에 투자하는 이상의 노력과 자금을 현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채플과 교목실을 두는 정도로 구색을 맞추는, 이름 뿐인 기독교 대학이 아니라 학생들이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돕는 커리큘럼을 갖춘 진정한 기독교 대학을 세우는 일, 생명의료 윤리, 개별 대중문화 등, 사회와 문화의
문제들을 사안 별로 연구하고 결과물들을 낳아 교회 교육에 내용을 제공할 수 있는 연구 단체나 프로젝트 등에 지원하는 일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걸지 않더라도,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와 하나님의 나라 회복을 위한 사역들에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 교회 내적으로는 교회 봉사의 순번제 같은 제도를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상황에 따라
헌신된 성도들 중에서 20~50%는 2-3년을 주기로 주일 학교나 성가대등 교회 봉사를 쉬게 하고, 대신 직업과 현장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교회 ‘운영’에 지장이 있을 거라는 우려가 있겠지만 이들이 2-3년 후에 다시 교회
섬김으로 돌아올 때는 교회 자체가 새로운 공급을 맛 볼 것이며 또한 끊임없이 현장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보냄으로써 전선은 점진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수요 예배 가지 않는 대신에, 주일 학교 봉사하지 않는 대신에 같은 시간과 노력으로 직장에서의 삶과 신앙이
부딪히는 문제, 청소년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양육할 것인가의 문제에 매달려 기도하고, 배우고, 연구하고, 나누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목회 전문 목회자가 현장의 전문가들과 함께 팀사역으로 목회를 하는 교회들에 관한 소식을 듣는
일은 매우 고무적이다. 예배당 중심의 신앙 생활(?)이 믿음의 잣대가 되는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지 않고는 세상은 그리스도 없음의
축복(?)과 축제를 계속 만끽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특별한 한계
상황이 아닌 이상, 신교대가 신병 교육을 제쳐두고 전투지에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다. 참으로 중요한 일은 전투 부대가 세워지는
일이다.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해야 한다. 물론 현장에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속단하건대)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많은 경우, 또 다시 신병 교육대의 역할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간과한다는 오해를 받더라도 전투지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우리가 부끄러워 하지 않는 복으므이
능력이 각 현장에서 면면히 드러나도록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워져야 한다. 각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이 내게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각 현장의 상황에 맞게 연합하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원론 외에는. 그리고 나 자신도 나의
현장의 문제에서 답을 찾는 묵묵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코스타를 이런 시각으로 본다. 지역 교회가 할 수 없는 일, 신병 교육대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을 키우는 일, 이것을 코스타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너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통하는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은 ‘제자를 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데까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다시 이루는 데까지, 그의 나라가 타락된 온 창조계에서 회복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정진호, ‘두 집 내기’).

2. 내가 보는 코스타 (미주 코스타)

최근의
통계를 볼 때, 코스타의 참석자 중 매년 70% 정도가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들이다. 매년 새로운 사람들이 코스타를 접하고
간다는 면에서 코스타를 매우 효과적인 사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반면에 한 번 온 사람들 중 70%가 다시 코스타에 오지 않는다는
얘기도 되는 셈이다. 이 통계 자료가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평가 자료나 의견(feedback)들을 참조하여 이것을
해석해 보면 코스타는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 혹은 ‘매 년 똑 같은 수양회’ 라는 얘기로도 볼 수 있다.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라는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한 결론을 이 자체만으로는 내릴 수 없다. 당연히 코스타 수양회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에 준하여 이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코스타의 목표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결단케 하는 것이라면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라는 것이 부정적 평가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두
번 영접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코스타의 목표가 복음화된 유학생들에게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확립하게 하는 것이라면 약
4박5일의 수양회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이 얼마나 확립될 수 있는가를 평가해 보아야 한다. 코스타의 목표가 유학생들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학문 연구와 신앙 생활을 격려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삶의 현장에서 선교적인 활동과 봉사의 삶을
살도록 한다는 것이라면 일주일의 수양회를 통해서 이 목표의 성취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평가해야만 한다. 사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모두는 코스타의 사명이자 핵심 정신(core value)이다 (미주코스타, ‘코스타란?’).

독자들 스스로
평가를 내리겠지만, 복음화의 목표를 제외하고는 한 번의 수양회를 통해서 나머지 목표들을 성취한다는 것은 턱도 없다. 일주일 내내
‘여러분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라고 외쳐대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감성보다는 지성,
설교보다는 강의에 촛점을 두고 교육을 위주로 하는 수양회로 완전 탈바꿈한다고 하더라도 한 번의 수양회로는 달성하기 쉽지 않은
목표이다. 나는 코스타가 복음전도 집회만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복음 전도의 우선성이라는 복음주의의 기본 입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코스타가 복음전도 집회만을 하는 수양회라면 나는 한 번 이상 가지는 않겠다. 내가 복음을 모르는 영혼들을 섬기겠다는 결정을 하여
섬기는 이로 가지 않는 이상. 나는 수양회에 2번 이상 참석하는 30%의 사람들중에는 이렇게 섬김의 마음으로 와서 헌신하는 많은
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섬김을 통해서 배우는 제자도는 매우 귀중한 배움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한 번 이상 오지 않는
수양회’가 된 것은 한국 교회의 신병 교육대적인 성격이 최근의 코스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복음 전도하는 것 이외에는 별 내용이 없는, 교회에서도 들을 수 있는 복음의 진수를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강렬하게 다시 듣는 것
이외에는, 어떤 참석자들의 보다 신랄한 표현을 빌리면, ‘화끈한 영적 샤워’로 끝나 버리는, 혹은 어느 정도 현장의 문제를 담긴
하지만 한 번 수양회 참석으로도 다 소화해 낼 수 있는 내용의 수양회… 코스타의 시작부터 세워졌던 목표들은 좋지만 지금
코스타의 모습은 처음의 그 목표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라는 반성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3.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양회


음화된 대학원생 유학생들을 돕는 가장 중요한 안건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전공 속에서 혹은 전공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라는 안건이고 둘째는 “캠퍼스와 지역 교회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며 섬길 것일까” 라는
안건이다. 코스타의 모든 프로그램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학생들을 복음화하는 일에 병행하여 이 두 가지 실제적인 안건을 중심으로
짜여져야 한다. 예를 들어 오전은 강의 중심으로 전공과 현장의 문제들을 다루고 저녁은 설교 중심으로 복음과 좁은 의미의 제자도를
다룰 수 있다. 오후의 세미나 트랙의 경우도 ‘구도자의 트랙’, ‘제자도의 트랙’, 그리고 ‘전공과 현장의 트랙’으로 분류 상
세 단계로 나누고 각 트랙에서도 내용의 깊이에 따라 레벨화하는 등 커리큘럼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강사에 따라 내용이 바뀌기
보다는 ‘체계화된 내용에 따라 강사를 선정해야’ 한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란 말이 나의 전공영역에서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에
대해서 학생들이 생각하도록 돕고 답을 찾도록 구체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생 사역을
이해하고 유학생들의 상황·현실에 따라 코스타 전체 프로그램 구조와 세미나의 커리큘럼을 짜기 위한 연구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한
연구팀을 구성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커리큘럼이 체계화된다고 가정하고 단순화된 예를 들어 보면,
(편의상의 구분에 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복음을 모른던 학생이 첫 해에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며, 둘째
해에는 제자로서의 삶에 대해 배우고 익히고, 셋째 해 이후부터는 자기의 전공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 것인가를 목표로
코스타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학생이라면 최소 두 번 이상 참석하여, 한 번은 제자로서의 헌신의
문제를, 그리고 두번째 해부터는 전공과 직업의 문제를 고민하고 돌아갈 수 있다. 또한 보다 헌신된 학생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전공과 현장의 문제들을 목표로 하여 동역자들을 만나고 현장의 삶을 함께 준비하는 코스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속적으로
복음의 핵심을 들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두번째로, 강사로부터
학생으로 주입되는 일방통행(one-way)의 설교·강의 흐름에서 학생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상호적(interactive)인
흐름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부생들과 달리 대학원생들은 강의도 하고 세미나도 발표하고 그룹 토론에도 참여한다. 대학원생이라는 것은
학생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직업이다. 즉, 대학원생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들에 맞는 형식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들을 학부생들처럼 일방적으로 앉혀 놓고 듣게 하는 것은 코스타에서 다뤄지는 내용과 참여자들의 질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다.
설교를 제외하고 전체 강의를 포함한 모든 강의에서 학생들의 질문과 토의 시간을 10-30분 정도 배정해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관중의 열기나 웃음 소리만으로, 혹은 구매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강의 테잎의 판매량으로 강의의 효과를 평가할 수
없다. 학생들이 그 내용을 되새길 수 있는 다른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채 쉴새 없이 쏟아붓는 것은 교육적 효과면에서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더구나 현장의 문제를 다룰 때 각 현장의 문제를 어느 정도 겪고 있는 학생들의
생각과 고민은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이런 고민들이 던져질 때,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원론에서 그치지 않고 현장의 문제들,
각론에 대한 해답을 끌어낼 수 있으며 최소한 학생들로 하여금 보다 현실적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학생 때부터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누고 함께 찾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막상 현장에 나갔을 때, 그 고민이 지속되고 연합이 지속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이 넓어져야 한다.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전공에 속한, 혹은 전공을 통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과 결과물들을 발표하고 나눌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전공과
관련된 한 가지 구체적인 문제를 연구한 논문 혹은 포스터 발표라든가, 전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팀 프로젝트라든가,
예술 작품이라든가, 문화 현상를 기독교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해 보는 보고서라든가, 각 전공에 따라 얼마든지 창조적인
참여가 가능하리라 본다. 기독교적 색깔이 전혀 없더라도, 학문의 논리에 충실한 결과물도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참여를 격려하는 것이 학생들을 현장의 그리스도인으로 구체적으로 준비 시키는 전투 훈련이 아닐까.

셋째로,
보다 연구하는 코스타가 되어야 한다. “아니 학업에 지친 몸을 좀 쉬러 왔는데 기독교 모임에서까지 왠 골치 아픈 소리요” 라고
한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전공마다 다르겠지만, 대학원생의 삶의 가장 기본은 연구하는 자세인데 왜 무엇보다 중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가” 라고 되묻고 싶다. 조용한 방청객으로 남아있기 보다, 밤을 새우는 토론과
나눔으로 현장의 문제를 건드리는 초기의 코스타 분위기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대학원생 모임은 자기 비판을 통한 자정 능력이 뛰어날
수 있다. 그런데 코스타에 대해서는 건설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뜨거워 할 말을 잊은 것일까? 생각 있는 사람들은 ‘이 운동은 아니다’ 라고 다 떠난 것일까? 나는
각각 자기의 전투지에서 고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스타가 전도 집회만이 아니고 또한 선교동원 운동만이 아니라면, 그러면 어떻게 유학생들의 다양한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다방면의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강사와 참여자, 그리고 내용의 폭을 봤을 때 아직 지엽적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코스타가
미국 유학생이란 커다란 사역 대상을 폭 넓게 품기 위해서는, 캠퍼스선교 운동과 선교동원 운동을 넘어서는 도약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 년에 걸친 체계적인 연구와 모델링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대할수 없는 일이다. 미주 내에 캠퍼스와 지역 교회의
사역을 파악하려고 막 시작되고 있는 코스타의 HOC 프로젝트는 이러한 노력의 아주 좋은 예이다. 뿐만 아니라 코스타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연구 위원 혹은 연구 간사와 같은 장치도 꼭 필요하리라 본다.

수련회를
평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진행에 대한 평가도 중요하지만 내용에 대한 평가는 필수적이다. 체계적인 평가자료를 개발하여
참석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 자료를 토대로 향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더불어 이 자료를 공개하여, 코스타라는 이름보다는
코스타에서 담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양회 참석을 유도하고 코스타의 현재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4. 맺으며


는 코스타를 잘 모르면서 편파적인 얘기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다들 아는 얘기를 장황하게 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동료 대학원생들과 함께 고민했던 몇 년의 시간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들에게 주셨던, 삶과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대한 외줄타기와
같은 균형에 대해 그저 스스럼 없이 나누었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타를 중요하게 보는 한 사람의 대학원생으로서의 관찰과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관찰과 생각들은 많은 일반화와, 때로는 기도보다 앞서는 운동성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타가 어떤 ‘Monument’가 아니라 하나의 ‘Movement’라면, 나는 이 운동을 현재의 나의 삶에
주요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가르침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