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2009 Conference 후기 (1)

감사, 감사, 감사…

감사 이외에 다른 어떤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올해도 나는 코스타 집회를 섬기며… 말할수 없는 사랑의 빚을 졌다!

앞으로 며칠간의 글들을 통해, 이번 집회에서 깨달은 것들, 생각한 것들, 아쉬운 것들을 나누고자 한다.

1996년부터 KOSTA 집회에 참석해 왔으므로 이제는 꽤 익숙할만도 한데,
이번 집회를 통해서 또다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다.

아무래도 이 블로그가 public한 setting 이므로 좀 더 private 하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은 하지 못하겠지만, -.-; (사실 그런 내용들이 무지 많은데…)

그러나 공개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아직은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아서 내내 졸립고… 피곤하고… 목소리도 잔뜩 쉬어있는 상태이지만,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 글로 정리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과연 감동과 감사를 글로다 표현할수 있을까.

KOSTA/USA-2009 집회를 기대하며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동민이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아니, 그저 군대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 그에게 군대 이야기를 처음 해 주었던 동네 아저씨에게서 들은 군대는 사람이 지낼
만한 곳이 아니었다
. 죽음의 위협을 느낄만한 고된 훈련, 아주 열악한
생활환경
, 끊임없는 구타 등이 군 생활의 일상이었다. 그 허풍쟁이 아저씨가
해준 무용담은
, 높은 절벽에서 병사들을 무작위로 떨어뜨려 살아남은 사람만 제대하게 했다든가,
정기적으로 산에 가서 곰이나 호랑이와 같은 야생짐승을 맨손으로 잡은 사람들이 진급하게 된다든가, 맨손으로 독사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날로 먹도록 훈련을 받는 다든가 하는 살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아저씨는 큰 악의 없이 8살짜리 꼬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꽤 나이가 들어서까지 군 복무에 대한 비합리적인 두려움은 동민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라는
현재 상황에서
,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 당장 매우 급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두려움이 그저
8
살짜리 꼬마의, 군 복무에 대하여 잘못된 두려움과 같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다
. 그러나 이 8살 꼬마의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은 없을까
. 그 아이가 가진 두려움이 실체혹은 진실을 잘못 파악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을까
.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영적 실체에 대한 바른 지식이 그들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할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만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지한 질문들을 우리 자신에게 묻게 된다
.

우리에게 과연 안정(security)을 가져다주는 궁극적 실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 이러한 질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얼마나 다를까
?


KOSTA-2009의 주제문의 일부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 그를 통한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과 두려움이, 허풍에 속은 8살짜리 꼬마가 가지는 수준의, 가벼운 것은
분명히 아니다
.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이 갖지 못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없는 소망이 외부로부터 (extra
nos
) 주어져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늘과 땅이 만났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통해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Shalom)를 주셨고, 그 평화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 2,000여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가 바로 그 평화와 용기로 세상에 대하여 승리를 선포하지 않았던가
.


이런 맥락에서, 이번 KOSTA/USA-2009 집회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소망한다.


첫째, 참된 평화(Shalom)
만들어낼 근거가 우리 안에 없음을 가슴 시리도록 깨닫게 되기 원한다
. 우리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어떤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이 우리가 노력해서 세상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없음을 발견하기 원한다. 우리 안에 소망의 근거가 없다는 간절한 목마름 속에서, 그 평화의 근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오게 되기 원한다
.


둘째, 예수의 평화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이 세상이 잃어버렸던, 그러나 예수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 우리가 그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 원한다
. 마치 참된 보석 앞에서 모조품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참된 예수의 평화를 보게 될 때, 우리가 의지하고자 했던 거짓 평안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


셋째, 그 평화의 감격에 흠뻑 적시길 원한다. 세상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평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평화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함께 모여 우리 모든 힘을 다해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 그 큰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감사하길 원한다
. 우리가 흘리는 감사의 눈물과 함께, 우리가 기대고자 했던 거짓된 안정에 대한 환상도 함께 씻겨져 나가게 될 것이다.


넷째, 내 삶, 내 가정,
내 결혼, 내 진로, 내 꿈,
내 소유, 내 직업 등에 매달려 자기중심적 삶을 살고 있던 천박한 모습에서 벗어나,
세상에 주신 예수의 평화라는 거대담론(Meta-Narrative)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게 되길 원한다
.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의 이야기에 생명력이 없음을 발견하고, 이제는 예수의 평화라는 새로운 이야기전개(Storyline)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길 원한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에야 비로소 세상을 향한 참된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한 놀라운 용기를 가질 근거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음을
발견하고 그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로 헌신하게 되기 원한다
. 우리를 둘러싼 여러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수준의 삶이 아니라
, 세상을 이기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도 목말라하는 평화와 용기가 바로 예수 안에 있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밝히 드러내겠노라고 함께 목청 높여 선언하는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지난 24년간 KOSTA/USA
통해서 일하셨던 주님의 신실하심에 기대어
,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가 선포되고 선언될 천국 잔치를 기대해본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성실함 (6)

 성실함 없이 일을 대하는 것은,
그 일이 그 사람에게 독이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성실함은 성숙함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성숙함이 수반되지 않은 ‘일’은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닐까.

때로 내가 아주 힘들어 하는 것은…
성숙함으로 부터 비롯된 성실함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일’에 뛰어는 사람을 보는 일이다.

물론, 내 자신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볼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

성실함 (5)

내가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할 수준은 안되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성실해진 것 같다.

또한,
내가 대단히 성숙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기엔 형편없이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내 스스로 지난 세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해 온 발자취를 보면,
내 성실함은 내 성숙함을 드러내는 표지였고,
내 성숙함은 내 성실함을 이끄는 힘이었다.

내 스스로 성실하지 못함으로 인해 절망하고 좌절할때,
내가 아끼는 이의 성실하지 못함을 보며 안타까워할때,
하나님의 손길이 당신의 자녀를 성숙함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의미에서 큰 위로가 된다.

성실함 (4)

무엇이 성실함을 재는 기준일까?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일까?
얼마나 많은 시간 “일”을 하는가 일까?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로 “일”에 임하는가 일까?

물론 그런 것들이 성실함을 재는 기준이 될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실함 자체를 재는 기준이라기 보다는 성실함의 열매의 일부를 재는 기준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위에 열거한 것들은, 단순히 성실함의 열매뿐아니라 그 사람의 다른 면들의 열매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잘못 판단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실함은
외면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면에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것을 재는 일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설때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성실함 (3)

성실함에 대해 핑계를 대는 사람들을 나는 매일 만난다.
누굴까?
당연히 나 자신이다.

좀 더 성실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핑계를 대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자면 깊이 실망스럽기도 하고 몹시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다른 어떤 것들은 잘 하는데…
사람이 완벽할수는 없지…
이정도 마음의 평안과 여유는 있어야지…
내가 이정도의 여유를 누릴 자격은 되지 않나…

그러나 성실함은, 내 performance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 attitude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무엇일 이루고 이루지 못하고를 기준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삶을 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성실함 (2)

성실함은 능력(competency)일까 성품(character)일까?

나는 오랫동안 성실함을 성품으로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쉽게 비난하기도 했고, 내 자신이 성실하지 못함을 많이 자책하기도 했다.

그런데, 혹시 성실함이 능력은 아닐까?
어떤 이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실함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닐까?

약속을 해 놓고도 반복해서 그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들,
늘 약속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
큰 소리를 쳐놓고 뒷감당을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성실하기위한 노력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기 위한 노력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과연 성실하지 못함이 책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하는 것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마 전문적인 심리학의 영역의 고민을 비전문가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이들을 대하면서 다른 이들을 양육하거나 훈련하거나 가르치거나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반복해서 마주치게 되는 고민이다.

성실함 (introduction)

직장 일이든, 직접적인 복음사역이든…
일을 하다보면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을 많이 느낀다.

특히 어떤 일을 부탁한 후,
그 일을 다시 점검하지 않아도 알아서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 생각만큼 많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실한 한 사람을 찾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고, 그런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참 귀한 일임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과연 더 건강한 복음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그렇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더 건강한 성숙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더 성실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인위적인 성실함과 건강한 성실함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성실함과 영성과는 어떤 관계일까.
성실한 사람과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이런 고민들이 성실함과 관련하여서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앞으로 시간이 되는 대로 몇번에 걸쳐… (몇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
최근 내가 ‘성실함’에 관하여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한번 써볼까 한다.

고난에 관하여 (final)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너무나 당연하게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이 문장이,
초등학생이 가볍게 이야기해면 그저 ‘예쁜 이야기’에 그치지만,

깊은 고난을 통해 귀한 열매를 맺은 사람이 이야기하면 그 말 자체에 엄청난 은혜가 실리게 되는 듯 하다.

고난에 관하여 알지 못하는 내가,
감히 고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부끄러운일이 될수 있겠으나,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대어, 내 사랑하는 이의 고난을 보며….
그와 내 자신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이렇게 한번 정리해 본다.

앞으로 몇년후에 이 글들을 다시 읽으며…
그때 내가 이해했던 것이 그렇게 천박한 수준밖에 되지 않았구나…
하며 얼굴을 붉히게 되기를 소망한다.

고난에 관하여 (8)

성혁아,

최근 네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같은 교회를 다니며 성장하던 시절의 너로만 너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네가 늘 그저 어린아이와 같기만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견디어 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난 참 네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너희 아버지가 예전에 그렇게도 판사가 되고 싶어 하셨는데, 정말 억울하게 판사가 될 기회를 놓쳐 개인 변호사로 개업하신 후 늘 그때 판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을 가지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네가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제는 네가 정확하게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매우 억울하게 판사 임용 직전에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도 엉뚱한 오해에 연루되어서.)
게다가 그런 상황 속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법조인의 세계를 잘 아시기 때문에 지금 네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더욱 많이 분개하고 계시다는 얘기도 들었다. 너를 통해 네 아버지께서는 대리만족도 많이 느끼고 계셨을텐데 말이야.

나는 소위 ‘가계에 흐르는 저주’ 뭐 그런 것은 전혀 믿지 않는 단다. 그런 argument는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미신에 가까운 것이지.
그러나 나는 모든 가족에는 그 가족이 짊어지고 대대로 물려주고 있는 악습, 잘못된 가풍, 가치관 등이 있다고 생각해.

혹시, 45년여 전에 너희 아버지에게 벌어졌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네가 교회 소그룹이 끝난 후 친교실 구석에 앉아 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분노와 보상심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때, 나라도 그렇게 억울했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만일 그런 억울한 일들을 보상받는 방법이, 나 대신 자녀가 못다이룬 꿈을 이루는 것이라면 너무 shallow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가지려는 꿈, 더 성취하려는 꿈은 자꾸만 커지게 마련이고, 대를 이어가면서 네 가족 안에서 계속해서 못다이룬 꿈을 그 자녀에게 이루게 하는 것이 이어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성취, 명예, 성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풍에는 여러가지 순기능이 있지만, 그것에 따른 역기능이 역시 매우 크니까… 만일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는 일이 있으려면 누군가는 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할텐데 말이야…
대를 이어가면서 도무지 그것을 끊을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안타까워 하고 계신데 말이야.., 만일 하나님께서 드디어 그 엄청난 일을 이룰 한 사람을 어떤 가문에서 발견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향해 어떤 일들을 하실까?

엄청난 사랑을 쏟아 부으시고, 모든 관심을 쏟으시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영향력을 받게 하시고, 훌륭한 훈련과 교욱도 공급하셔서… 정말 대를 이어온 그 폐습을 끊어 낼 수 있는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시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중에 그 일을 이룬 사람의 마음에, 성공와 명예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JOY를 허락하시지 않을까?

개인의 성취와 영예가 겨우 당대에 그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어떤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만들어 가시는 선한 영향력은 개인의 수준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의 시간 scale을 넘어…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시원한 생수와 같은 것이 되지 않니.

선교사로 나가 있는 네 형과 같이 믿음 좋은 사람도 있는데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을 네가 해볼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하나님께서는 널 그렇게 대단하게 보신다는 말이 아닐까. 너라면 이 일을 할 수 있어… 너라면 겨우 네 개인의 성공과 영예와 성취, 그리고 기껏해야 네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수준의 그런 삶의 scale을 벗어나서 훨씬 더 넓고 큰 scale의 삶을 살 수 있어 라고 그렇게 네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너를 위해 기도할때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할때는 무겁고 힘든 마음이다가도 조금만 기도를 하면서 그분의 마음에 함께 마음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너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너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기대로 마음이 벅차진단다.

성혁아,
신앙의 성숙이란,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높여가는 과정이란다.
신앙의 성숙이 깊어지면 깊어 질수록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게 되는 것이지.
나는, 하나님께서 너를 그 심오하고도 풍성한 세계로 이끌고 계심을 본단다.

넌 잘 해낼꺼야. I’m truly proud of you!

with Peace of Jesus,
승호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