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nt – 내 묵상 (10)

영혼구원, 개인전도, 구원영접초청, 회심에의 강조 등등이 과연 ‘총체적인 복음’과는 상충되는 개념일까?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총체적인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위에 언급한 것들은 ‘옛날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을 발견한다.

나는 총제적 복음의 중요성을 분명히 확신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식의 전도 방법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도 완전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또한 깊이 동의하는 것은,
소위 ‘good old gospel’ 진영(?)에서 이야기하는대로, 뜨거운 복음 선포, 영혼구원에 대한 강력한 도전 등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총체적 복음은, 그야말로, 총체적이어야 한다.
새롭게 인식하게된 복음의 부족한 부분들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버리지 말아야할 것을 그저 철지난 것으로 치부해버리면 너무 큰것을 잃게된다.

아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성경해석의 입장, 역사와 성경과의 관계, 실제적인 어떤 사회 이슈들에대한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대단히 불편해할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입장은 그런의미에서, good old gospel만을 주장하는 분들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에 대한 강조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reductionist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왜곡과 오해가 발생할 수 있고, 그것을 피해야한다는 것 동의한다.

그렇다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던 것을 깡그리 뒤집어버리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결국 기독교 내에서도 진영논리에의해 나누어져, 보수꼴통과 종북좌파만 남아있는 식이 되면 안된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총체적 복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한쪽의 정치적 신학적 성향을 띄고있는 것에 우려를 가지고 있다.

총체적 복음은,
말 그래도 총체적이어야 한다.

The Sent – 내 묵상 (9)

일상생활에서의 missional함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다보면,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게 될 위험성이 있다.

그것에 관해서는,
최근에 내가 잘 아는 어떤 사람이 아주 훌륭한 글을 썼다.
여기 클릭

사실,
10여년 전에,
코스타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 몇가지 정리했던 것이 있었다.
그때, 정리한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리고 feedback을 받았었다.

그중,
한국의 이태웅 목사님께서 해주셨던 comment를 잊을 수 없다.

코스타가 미국 내에서 살아가는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참 좋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자칫 자신이 편하게 여기는 상황에 안주하는 것에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위에,
내가 링크한 그 글에서 한 이야기와 같은 맥락의 조언이었다.

The Sent – 내 묵상 (8)

적어도 학생-청년들에 관해서는,
Missional 하게 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삶 전체를 ‘여정(journey)’로 보지 않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거쳐가는 과정(pathway)’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좀 과장된 예를 들어보자.
나이가 들어서, 결혼을 해야한다는 온갖 압력과 핍박에 시달리는 ‘교회 누나 / 교회 오빠’들을 보면, 많은 경우, 결혼만 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좋은 가정이라는 목표를 이루기위한 과정으로 생각한다.

신앙의 중요한 장래 목표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자신의 중요한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현재 신앙활동들이 정리된다.
그리고 그 장래목표를 이루기위한 것 이외에 다른 것들에 쉽게 마음이 가지도 않고 그것들은 ‘부수적인’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 다른 것들은 미루어 놓는다.

결혼만 하면 헌신할께요, 졸업하고 나서 성경공부 하죠, 취직만 하면 그때 신앙을 좀 가져볼까요… 식이다.

신앙이 목표에 돌진하기위한 거쳐가는 highway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설정해 놓은 목표들이… 거짓 신앙에 의해 정당화된 자기 욕심들이니…
그 목표에 도달하면 허탈해져서 그 다음 목표를 설정하게 되고…
결국 신기루를 쫓아 매진하며, 부르심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것이다.

이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
거짓 신앙에 의해 정당화된 거짓 욕심을 버리도록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highway로 생각하며 달려가고 있는 길 자체가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어쩌다가 여러가지 아픔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는 후배들에게 나는.
지금 이 아픔의 과정을 겪어 가면서,
이것을 극복해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목적이 되어야 한다. 고 이야기해주곤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단순화된 어떤 목적을 이루기위해 highway를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해가는 journey 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가지고 창세기 본문을 잘 강해한다거나 하면, 이 부분을 참 잘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출애굽기 같은 것도 이것을 다루기에 꽤 괜찮았을 테고…
신약 서신서에 나타난 신약 공동체의 모습들 속에서도 이런것을 다루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다니엘에서도 찾아볼수 있었을 것 같고.

나는 사실,
missional한 이야기를 다루는 첫 step으로써, 코스타가 이 부분에 한해 좀 focus해서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긴 했었다.
그렇게 하면 청년-학생들에게 좀 더 tangible한 방식으로 missional한 으로의 bridge를 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뭐 그냥 나만 혼자 했던 생각이었다. ^^)

The Sent – 내 묵상 (7)

복음은,
우리에게 목표를 설정하게 해 주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define 해주는가?

몇년전,
코스타 간사 수양회에서 설교했을때, 이런 비유를 쓴 적이 있었다.

축구를 잘 하려면, 어느 방향으로 공을 차야하는지 하는 것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공을 잘 다루고, 그곳에 다다르기 위한 적절한 작전과 기술을 잘 체득하기도 해야한다.

때로,
어떤 보수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나치게 개인화해서, 공을 잘 다루는 것만 치중한 채, 엉뚱한 방향으로 공을 차곤 하고,
어떤 진보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나치게 탈개인화해서, 공을 차는 방향만을 이야기한채, 다룰줄 모르는 것 같다.

좀 더 직접적인 예를 들어보자.

약자에대한 돌봄을 이야기해보자.
나는 성경이 약자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약한사람을 돌보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이 있으니, 그것을 위해서 돌격 앞으로!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약자를 돌보는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고, 성경공부 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직접 나가서 밥을 퍼주고, 돈을 아껴 사람들을 돕고, 국제 구호활동을 지원하고…
우리의 목적을 행해 돌격 앞으로!

이것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취하는 자세이다.

그런데,
나는 복음이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것을 이루어나가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악을 이기시고 세상의 왕이 되신 방법이 무엇이었던가?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처형당하신 것이었다.
바울이 자랑하고자 했던 것은 그래서 십자가였다.

사람들에게 윽박지르고, 압력을 행사하고, 데모를 조직하고, 빨간띠를 두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의해 핍박을 당하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나는,
적어도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와 진보적 복음주의자를 모두 포함해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것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이야기를 좀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자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동성애 반대 캠페인을 한다면, 그 전체가 모두 비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약자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그렇지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비꼼과 비웃음과 지식을 자랑하는 자세로 한다면, 그 전체가 모두 비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의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20여년전, 홍정길 목사님께서 설교중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으며 깊이 찔렸던 기억이 난다.)

기독교의 승리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핏대를 올려 승리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취한다.
기독교 승리주의에 대한 반성과 대안은 사랑이다.
복음의 방법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이다.

사랑으로서 진리를 이야기해야한다.
사랑없이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진리없이 사랑을 이야기하는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사랑이 없다면 진리를 이야기하지 말아야한다.

결국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과 함께 파생되어 나오는 겸손, 섬김, 기쁨, 온유함, 희생 등등이다.

나는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missional함을 잃어버린 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The Sent – 내 묵상 (6)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신다는 이야기를 할때, 빠질 수 없는 것은 ‘성령’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당연히 삼위 하나님중 한분이신 하나님의 영이 주도해서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하도 치우치게 접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성령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신경이 곤두서고 긴장하게 되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가끔 어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열정적으로 헌신해서 살기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고, 아는 것도 많은데,
성령에 이끌리어 살고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운 경우를 만난다.

내가 적어도 경험하기에,
성령을 가장 깊이 인정하면서 살게하는 것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할 때이다.

심한 개인적인 crisis를 겪고 있는 non-Christian에게, 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복음을 전해본적이 있는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믿어지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사람과 성경공부를 해본적이 있는가?

자기는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데 돌아서면 바로 신앙 없는 사람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에게, 사실 네가 정말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고 challenge 하며 정말 복음을 깊이 나누어본 적이 있는가?

만일 이런 경험들이 있다면,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고 가슴이 아파서, 발을 동동구르면서, 성령께서 일하시길 기도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께서 그렇게 일하셨을때, 내가 그렇게 많이 노력했음에도, 이것이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한 일임을 겸손히 고백할수 밖에 없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나는 복음전도가 사회참여에 우선한다는 식의 argument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전도의 영역 뿐 아니라, 공적인 신앙의 영역, 그리고 non-religious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 세상을 변혁함, 말씀, 정의를 하수같이, 약자를 위한 섬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을 보면서)
가끔은…
정말 저 사람들이 그 주도권을 성령님께 드리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때가 있다.

missional한 모델을 찾아내는 중요한 작업은,
사도행전과 같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에서 해볼 수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이 시대에 missional한 자세를 찾아내는 매우 중요한 key가,
성령을 따르는 자세를 회복하는 것에 있지 않는 하는 생각을 한다.

성도 개인 안에서 성도를 이끌어가시는 성령님,
공동체 속에서, 그 공동체의 마음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

뭔가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The Sent – 내 묵상 (5)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분의 창조주 되심, 공의로우심, 완전하심, 자유로우심, ‘타자'(other)되심 등등…다소 철학적, 조직신학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redemption이라는 차원에서도 이걸 풀어갈 수 있다.
죄로인해 깨어진 세상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그분의 계획과, 그분의 주로도, 그분이 직접 회복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좀 더 성서신학적 접근이 되겠다.

또한,
실제적 접근으로도 이것을 풀어갈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우리가 control 하려 할때, 반복해서 messy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개인적, 공적)을 take charge 하셔서 그것을 인도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께 순종할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참다운 ‘우리됨’ 혹은 ‘사람됨’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내 생각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는 포인트가 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 (working for the kingdom),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building the kingdom) 사람들이 아니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의 자세 속에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document들 속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그리고… 내가 끊임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우리 코스타의 document나 우리 운동의 방향 속에서도,
그리고 내 삶과 생각과 자세와 글 속에서도…
우리가/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는 많이 등장한다.

가만히 여기저기를 살펴보라.
놀라울 정도로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은 말꼬리 잡고, expression이 신성모독적이니 그걸 정죄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assumption 자체에 대해 challenge 하고 있는 것이다.)

The Sent – 내 묵상 (4)

내 생각에,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이야기할때,
빠져서는 안되는 대단히 중요한 것은 그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중요한 key는,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신앙의 공공성인것 같아 보인다.

신앙의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신앙의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supporting argument로 하나님의 선교를 차용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교가 원래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요한 부분을 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 같다.

나는 신앙의 공공성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앙의 사유화될때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본질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의 공공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상위 개념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리고 신앙의 공공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질때 따라오는 consequence 이다.

나는,
지금 이 시대에 다루어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슈는,
신앙의 공공성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흔히 hyper-Calvinist들이 이야기하는 식의 하나님의 주권이야기와는 다른 것이다. 나는 hyper-Calvinist들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신앙의 공공성을 이야기할때,
하나님의 주권 이야기를 충분히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신앙의 공공성은 하나님의 주권 개념으로 부터 파생되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반대방향으로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보냄받은 사람의 ‘원조’인 아브라함도 그랬고,
그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고,
신약의 백성들도 그랬고,
심지어는 예수님도 그랬다.

The Sent – 내 묵상 (3)

나름대로 지난 25년정도 동안,
꽤 많은 ‘청년’들과 성경공부도 하고 전도, 양육, 훈련 하는 일들을 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그렇게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함께 교회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성향이 바뀌는 어떤 시점을 경험했었다.

가령,
성경공부 모임을 한다고 하자. 아니면 청년부 모임도 좋고, 개척교회도 좋다.
하여간 그런 community/gathering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중에,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reach-out 하겠다는 선한 마음이 그 멤버들 가운데 생겼다고 하자.

예전에는…
그런 마음이 생기면, 각각의 사람들이 말씀을 들고 친구에게 갔다.
그리고 사영리를 펴서,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면서, 혹은 밥을 사주면서… 하여간 어떻게든 그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는 일들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reach out에 대한 마음이 생기면….
학생들이, reach out을 위한 프로그램을 모임 안에서 만들고자 하는 것을 발견했다.
혹은 전도를 위한 찬양집회를 계획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씀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reach-out을 하는 프로그램, 이벤트, 조직 등등을 만들어서 그것을 해보고 싶어 했다.

자기가 말씀을 들고 누군가와 나누기보다는,
전도하는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만들자고 목사님에게 리더에게 조르는 것이다.

나는 이런 성향이,
이 전 글에서 쓴…
대형교회나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선교단체등의 프로그램에 의해 사람들이 길러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적으로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은 매우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프로그램 자체를 모두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건강한 프로그램은 유익이 많다.
그러나, 개인적인 책임을 대부분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비뚤어진 공동체 의식이 아닐까 싶다.

다른 시리즈의 글에서 한번 다루어볼까 생각중이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이 세상 속에서의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세는,
유앙겔리온(왕이 태어났다는/승리했다는 선포)을 이야기하거나,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징가랑 태권브이랑 싸우면 누가 이기냐… 하는 대결에서 누가 쎄냐 뭐 그런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 것 같아 보일때가 많다.

니네보다는 우리 하나님이 더 힘쎄.
니네가 믿는 것 보다는 우리가 믿는게 더 좋아.
뭐 그런.

The Sent – 내 묵상 (2)

내 신앙에 영향을 끼친 분들중에는 목회자들도 있지만, 평신도들이 더 많다.
단순히 그분들의 신앙에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신학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중에는 ‘평신도 설교자’라고 일컬을 수 있는 분들도 있다.

내 평생동안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설교를 꼽으라면,
대학교 4학년때, 김인수 교수님이 내가 다니던 대전의 작은 개척교회에 오셔서 하셨던 설교가 top 3 안에 들어간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평신도들이 그렇게 섬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norm인 것으로 여기며 20대 초반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면 큰 blessing이었다.)

후에 코스타를 섬기면서,
‘평신도 설교자’를 찾으려고 참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그 평신도 설교자들이…
손봉호-이만열-김인수 교수님 세대 이후에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아래 세대로
강영안 교수님이나 그리고 더 아래로는 장평훈 교수님 같은 분들이 계셨는데,
그보다 더 아래세대로는 거의 씨가 말랐다고 느껴졌었다.
(잘 몰라서 그런이유도 크겠지만…)

어쩌다 평신도가 설교한다고 하는걸 들어보면,
자기자랑을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수준이었고,
성경 말씀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설교자를 찾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왜 그런걸까?

꽤 오랜시간 그런 고민을 했었다.
아직도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닌데…
한가지 내가 가지고 있는 hypothesis는,
50년대생 후반 정도부터는…
신앙 리더들의 신앙이 대학생 선교단체나 대형교회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길러진 사람들이 다수라는 것이다.

예전 사람들은,
말하자면 프로그램, 제자훈련 그런거 없는 상황 속에서,
나름 성경 읽고, 그거 들고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교회에서 교사하고, 그러다가 혼자서 더 성경 연구도 하고… 그렇게 자란 반면,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아래 세대 사람들은,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서 키워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좋은 resource를 공급받기는 했지만,
그 프로그램을 넘어서 더 성장하는 일이 극히 드물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기가 개인으로서 missional하도록 성장하는 일이 더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 내 한가지 가설이다.

@ 금년 코스타주제랑 무슨 연관이 있는 얘기냐고 물으실 분들이 있겠지만,
결국 missional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고민이 The sent의 주제와 가장 잘 align된다고 보여 missional 한것에대한 생각을 많이 나누어보려고 생각중이다. ^^

The Sent – 내 묵상 (1)

매년 코스타 주제를 여러가지로 생각해보고, 나름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말씀 묵상도 하면서 참 큰 유익을 얻었다.

비록 금년에 땡땡이치고 결석하는 불량 코스탄이 되었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다른해 만큼 공부하고 묵상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내가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보는 것이 유익이 있을 것 같다.

아마도 systematic한 묵상이라기 보다는,
잡생각들의 모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사실 지난번에 인디 컨퍼런스 즈음해서,
나름대로 내 생각을 정리해서 올려보려고 했으나,
적어도 시카고 집회가 끝날때가지 기다렸다가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서,
정리를 좀 미루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아직 시카고와 인디 설교와 강의를 아직 하나도 듣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