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에 대하여 (2) – 진리는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진리란, 세상이 움직여지는 universal한 원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여러가지 지식을 담아낼 수 있는 일종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예를 들면,
음식이 오래두면 상한다 라는 ‘진리’를 알고 있다면,
우유는 오래두면 상하는데… 과연 계란은 오래두면 상할까? 라는 질문을 훨씬 더 자연스럽게 답할 수 있다.

음식이 오래두면 상한다는 ‘진리’가 없으면,
음식재료마다 이건 오래두면 상할까 하는 여부를 경험을 통해서 조각조각 모아야한다.
그리고 가끔은… 어? 우유는 냉장고 밖에 놓으면 하루만에 상하는데, 김은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네. 아마 김은 상하지 않는 음식인가보다… 뭐 이런 황당한 결론에 도달할수도 있다.

때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오래 살아온 어른들을 보면,
그분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참 지혜로운 모습을 보게된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믿고있는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을 맞닥드렸을때, 참 지혜롭게 결정하고 행동한다.

나는,
그런 분들의 지혜는, 진리를 몸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at least partially)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세상은 어떤 곳이고,
죄가 어떤 것이고,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냥 ‘온 몸’으로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기독교에서 그런 지혜를 이야기하고, 나도 기독교에서 그런 지혜를 많이 배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에서 지식을 많이 이야기하긴 하는데,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어졌다.
프로그램을 통한 지식의 공급을 이야기하지만, event를 통한 경험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것을 통합해내는 지혜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가끔 깊은 신앙에서 나오는 진리를 가진 어른들에게서 보게되는 지혜의 광채를,
과연 내 세대나 내 다음 세대로부터 얼마나 찾아볼 수 있을까.

지혜에 대하여 (1)

지혜란 무엇일까.
Wikipedia에 따르면, 지혜는 지식, 경험, 이해, 상식, 통찰들을 사용하여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한다.
(Wisdom is the ability to think and act using knowledge, experience, understanding, common sense, and insight.)

나는 뭐 철학에 관하여, 문외한에 가까우므로, 지혜의 정의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주변에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되는데 (특히 이곳 실리콘 밸리에서는)
그런 대비를 통해서 제한적으로나마 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조금 더 배울 수 있게 되는 것 같긴 하다.

지식이 도구라면, 지혜는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이 식재료라면, 지혜는 요리기술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지혜는 지식과 경험 등을 통합해 내는 (integration)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자주…
지식을 지혜로 환원시키려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정말 지혜에 대한 갈망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요즘,
잠언을 묵상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지혜에 대하여 여러가지 생각을 참 많이 하고 있다.

이혼에 대해서 (4)

나는,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아름다운 가정을 promote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 = 좋은 가정 식의 등식이 만들어 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내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가 가정을 너무 우상화하여서, 하나님을 상대화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오히려,
가정자체를 하나님의 절대성 앞에서 충분히 상대화할때,
가정을 제 위치에 놓고 보는 perspective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독교=좋은 가정 의 등식이 만들어 지는 것은,
기독교=풍족한 경제생활 이나, 기독교=직업적 성공 의 등식이 만들어지는 것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독교=좋은 가정의 등식 때문에,
깨어진 가정의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곤 한다.

기독교 복음은,
깨어진 세상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뉴스이다.
그리고 그 깨어짐이 바로잡아지게 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뉴스이다.
그러나, 복음이 깨어짐의 해결이 immediately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때로 그 깨어짐의 해결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더욱 자주, 오히려, 그 깨어진 모습 속에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을 이야기한다.

….

나는 이 글의 처음에 내가 언급한 대로,
이혼을 교통사고와 같이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안전운전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교통사고 예방책을 잘 만들되,
교통사고 당한 사람들을 잘 돌보아주고,
교통사고 당한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책임을 묻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아, 물론 운전자 과실로 교통사고가 생기는 경우도 정말 많이 있다. 정말…)

언젠가,
하나님께서 언젠가 교통사고가 없는 system을 만드실테고,
교통사고의 아픔을 겪었던 모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으실테니.

이혼에 대해서 (3)

매우 관계가 좋지 않은 부부가 이혼을 하지 않는 것에는 큰 유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어려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되는 것이다.

관계가 나아지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물론 필요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당장 그것이 어려울수도 있다.
그럴 경우, 단기적인 관계의 개선에 목을 매는것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야말로 하늘이 열리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problem solver의 역할을 해주기 보다는
(물론 problem solver가 될때도 있지만…)
problem에 대하여 다른 perspective를 가지게 해준다.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좋은 부부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애매하게 교통사고를 겪게 되는 것과 같이, 관계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때, 그 깨어진 죄의 모습 속에서, 그 문제의 해결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자신과 잘 맞지 않는 배우자와 평생을 살수도 있다.
그러면 서로 맞추어 가야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럴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혼에 대해서 (2)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혼을 피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기독교인들의 자세가,
‘정죄’에 치우치는 것이 많이 속이 상한다.

이혼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의 깨어짐은, 결국 죄의 결과이다.
여기서의 죄란, 개개인의 죄를 물론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개념이다.
system 자체가 깨어진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는,
Ultimate judge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정을 잘 꾸미고 살아가는 것이 참 바람직하고 아름답다. 성경도 그것을 promote 한다.
그렇지만,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지 정죄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나는,
사랑과 공의가 충돌하는 것 같아 보일때,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선택일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반복해서 명령하셨지만, 판단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분별하라, 지혜로와라 등등의 명령이 물론 있지만.)

거룩함에 대해서 흔히 공의로움과 연관을 시켜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거룩함은 구별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제일의 표지가 사랑이라면, 그리스도인이 가장 분명하게 세상과 다른 것도 사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혼의 과정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사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혼의 과정 속에서 신앙을 잃고 하나님을 떠난 경우도 있다.

그 아픈 이혼의 과정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이들이 경험한다면…
그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이 주변의 그리스도인들로 부터 느껴지게된다면…

이혼에 대해서 (1)

지난 주일 새벽에… (4시 경이었던가…)
한국에서 어떤 악당 한 사람이 카톡을 보내왔다.

이혼에 대한 어떤 분의 언급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몇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그중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혼에 대해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있었는데,
이 기회에 한번 정리해보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혼은 교통사고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1.
교통사고는 가능하면 내지 않도록 피해야 한다. 운전자의 일차적 책임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가는 것이다.
따라서 교통사로를 내게 된다면, 그것은 운전자가 지켜야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 된다.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는 것은 물론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일부러 교통사로를 내면, 그 사람은 형사처벌도 받을 수 있다.
말하자면 ‘죄’이다.

2.
그러나 더 큰 사고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차악을 선택하는 교통사고도 있다.
가령, 자동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봇대를 들이받는 다거나,
횡단보도의 사람을 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옆차와 가벼운 충돌을 하게 된다거나.
이혼도, 더 심각한 문제를 피하는 차악의 방법으로 선택할 경우도 있다. (가정폭력이라던가, 생명의 위협이라던가….)

3.
열심히 방어운전을 하고, 아주 열심히 하더라도, 교통사로를 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4.
교통사고는, 어디까지가 부주의/잘못인지, 어디까지가 그 사람의 운전실력의 부족인지, 어디까지가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판단하기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다.
이혼도 역시 그렇다.
어떤 경우에는 순전히 이혼한 사람이, 인생을 잘 꾸려갈 능력이 없어서 (인격적, 경제적, 관계적, 감정적…) 이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그 사람의 이혼은 능력의 부족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말하자면 무능력인 것이다.
무능력을 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령충만과 성령충분

예전에 대천덕 신부님은,
성령충만과 성령충분을 구분해서 설명하셨었다.

성령충분은 헬라어에서 ‘흠뻑 적셔지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인데,
이것은 성령이 장기적으로 충분하게 채워진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이로인한 것은, 성품이 변화되고, 성숙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헬라어에서 ‘가득 채워지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인데,
이것은 성령이 일시적으로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고, 여러가지 은사가 나타나게 된다.

대천덕 신부님은,
신자라면 누구든지 성령충분을 경험하고 추구해야 하지만
또한 성령충만으로 인해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었다.

성령충분은 일회적이고 지속적이지만,
성령충만은 여러번에 걸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나는 신학적 깊이가 깊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험적으로 성령을 깊이 경험한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대천덕 신부님께서 말씀하신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바와 경험한바를 참 잘 설명하는 것 같다.

나는,
일반적으로 ‘수련회’가 남용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종교장사’를 하는 방편으로 수련회를 하곤 한다.

그렇지만,
가끔, 하나님께서 ‘수련회’를 통해서 특별히 성령충만을 공급해주실때가 있는 것을 경험했었다.

어떤땐,
정말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적도 있었다.
그래서… 참 오랫동안 수양회 운동을 섬겼었고.

이번 주말에는,
하나의 씨앗교회의 수련회가 있다.
그리고 이제 인디에서 열린 수련회가 한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두달 후에는 시카고에서…

수련회를 통해서,
바짝 말라버린 영혼에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일들이 있으면 좋겠다.
정말…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때로는… 도무지 사람이 무언가를 끌어 올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의 끝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기도 하지 않던가.

@ 그나저나, 대천덕 신부닝은 참… 그리운 분 가운데 한분이다. 내가 비록 그분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말이다.

출장에서 배운 것들 (3)

1.
일본의 실업률이 대충 3~4% 수준이라고 들었다. 이 정도면 거의 완전고용에 가까운 수준 아닌가?
그렇지만,
일본의 청년 실업률은, 거의 10% 수준이라고 들었다.
수치상으로는 한국의 청년실업률과 비슷한 수준이거다.

그런데,
실제로 일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이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청년 실업률은 그렇게 높지 않다.

한국은 소위 ‘취준생’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이거니와,
그나마 소위 비정규직 저임금의 ‘알바를 뛰고’ 있는데…

적어도 내가 만나는 일본 사람들은, 그래도 노력하면 그럭저럭 일자리는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일본인들과 좀 다른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일까?

2.
일본은 아직도 ‘평생직장’의 개념이 있다.
우리 회사도 일본에 몇개의 business group이 있는데, 거기 사람들은 절대로 안짤린단다. -.-;
그리고, 정말 회사를 위해서 아주 열심히 일한다. (곁에서 보기에 불쌍해 보일정도로…) 대신 회사는, 짜르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가고,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래도 그리 나쁘지 않은 수준의 연금도 은퇴 후에 제공해준다. (그 연금만으로 살기는 어렵다고 들었다. 그래도 한국 보다는 훨씬 더 상황이 좋은 것 같았다.)

미국식의 무한경쟁… 자기의 삶은 자기가 책임져야한다는 개인주의적인 접근,
일본식의 평생직장… 어쨌든 함께간다…는 식의 접근.

한국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오히려 직장인들이 더 힘든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3.
일본의 회사 체계는, 대단히 rigid 하다.
말하자면 유두리가 없다.
무슨 결정을 하나 하려고 해도, 기존에 해오던 방식이 아니면 뭔가를 해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대신, 한번 setup이 되면, 지루할정도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을 한다.
사실 제조업에서는, 이런 consistency가 대단히 중요하다.
agile 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consistent 한 것이 제조업에서 강점이 되는 것이다. (이건 독일도 비슷하다.)

반면,
한국이나 미국은 일본보다 훨씬 더 agile 하다.
미국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율권이 커서 agile 한 반면,
한국은, 일이 되게하기 위해서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여서 agile 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agile한 manufacturing을 갖고 있는 전 세계에 매우 드문 경우가 아닌가싶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조업 자체가 DNA로 가져야하는 ‘진득함’이 전반적으로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내가 보기에,
중국은 일본보다는 한국의 모델을 따라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제조업의 등장은, 일본보다는 한국에게 더 큰 위협이 아닌가 싶다.

출장에서 배운 것들 (2)

일본에서 만나는 엔지니어들은, 그 수준이 상당하다.
내가 주로 상대하는 회사는, 일본의 중소기업들이다.
크게는 직원 몇천명 수준의 회사로부터 작게는 직원 수십명 수준의 회사들이다.
이렇게 출장을 가면, 그 회사의 CEO로부터 말단 엔지니어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Business transaction을 담당하는 사람, 기술 개발을 하는 엔지니어, 기술쪽 매니저, 행정비서, 특허나 법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 logistics 담당, 회사의 executives…

그런데,
그런 작은 회사들을 보면,
정말 detail을 자세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단 엔지니어로서 있다.

반면,
한국이나 미국, 혹은 중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찾기가 훨씬 더 어렵다.
(가령 한국에서는 대기업에 이런 사람들이 좀 있다. 그렇지만 중소기업에서 찾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일본과 비슷하게, 아주 실력이 탄탄한 말단 엔지니어들을 만날 수 있는 나라는 독일이다.
심지어는 독일에서 대학도 나오지 않은, 직업학교 출신의 엔지니어이지만, 그 분야에 깊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비교적 제한적이므로,
얼마나 일반화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랫동안 제조업을 해온 나라가 갖는 탄탄한 저력이자 기반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런 고수 말단 엔지니어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대우가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다고 들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런 사람들과 박사들의 pay 차이가 미국같은 나라보다는 훨씬 적어서 실제로 이렇게 사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게 정말 사실인지는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독일에서, 말단 엔지니어와 높은 상사가 함께 business trip을 할 경우,
말단 엔지니어는 비지니스 클래스를 태우고, 높은 상사는 이코노미를 탄다고.
왜냐하면 현지에 가서 실제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말단 엔지니어이기 때문에.
(다음에 언제 이것도 한번 물어봐야 겠다. ㅎㅎ)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미국은 한때 탄탄했던 제조업의 기반이 붕괴된 상태인 것 같고,
한국은 아직 이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국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쓰지 않으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현재 한국의 기업이나 사회의 system으로 보아, 한국이 이런 수준까지 도달하게 될까 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 의문이 있기도 하다.

출장에서 배운 것들 (1)

나는 출장을 많이 다니는 편이다.
이게 개인적으로 꽤 힘들기도 하지만, 가족들에게도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여러나라에 출장을 다니면서 여러가지를 참 많이 배운다.
지금껏 내가 주로 business를 하면서 다루어본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현지 방문: 일본, 독일, 한국 & 미국(^^)
현지 사람들과 많이 만나서 이야기함 : 중국, 대만, 일본, 한국, 홍콩
출신 이민자들과 많이 일함: 인도, 중국, 대만, 한국
제한적으로 만나서 일함 : 태국, 멕시코, 영국, 러시아

이 사람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면 여러가지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참 많이 있다.

뭐 내가 대단히 깊은 다문화적 이해가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여기에 정리해볼 수 있는 것이 대단히 제한적인 것일테고,
뭔가 종합적인 insight라기 보다는 단편적인 생각들일테지만,
한번 출장을 다녀올때마다 정리해볼 수 있는 생각들을 한번 출장때마다 2-3개씩 적어보려고 한다.

우선,
내가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 배우게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일본은 이런 나라다, 중국은 이런 나라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매우 많이 들었다.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들 가운데 맞는 이야기들이 참 많이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롭게 배우게되는 것도 많고,
어설프게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깨지는 경우도 많다.

구 동독 지역에 살고 있는, 50대의 구 동독인이 돌이켜보는 독일 통일,
역시 구 동덕 지역에 살고 있는, 통일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 생각하는 통일에 대해 들으면서,
깨달은 것들이 있었다.

토요일 밤 늦게까지 일하면서도 불평하나 하지 않는 일본인 엔지니어와 밤 늦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과 가족, 직업과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게되는 일이 참 좋았었다.

중국의 어느 ‘시골’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천안문 사태를 대학생때 경험한 엔지니어가 홍콩에서 일하면서 하는 고민을 들으며, 문화와 역사와 신앙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정복주의적인 혹은 제국주의적인 문화적/신앙적 접근을 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내가 알고 있는 신앙은 진리이고, 너는 다 틀렸다는 식으로 이들에게 윽박지를수 없다.
오히려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내 신앙이 얼마나 좁은 문화적 바운더리에 갖혀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나는 주로 그들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
그러면, 많은 경우 그들은, 더듬거리는 영어로, 매우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존경심을, 한편으로는 부러움을, 한편으로는 연민을, 한편으로는 동료애를, 한편으로는 이질감을 느끼지만…

이런 대화들은, 나를 많이 겸손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