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이유 (introduction)

이제 며칠후면 나는 HP를 떠나,
작은 start-up company를 시작하게 된다.
뭐 내가 혼자 회사를 시작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내가 founder인 것도 아니지만,
처음 시작하는 4명짜리 회사의 일원이니… initial employee 라고 부를 수는 있겠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2-3년 전만 하더라도 내가 이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앞으로 며칠에 나누어서,
내가 왜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하는 내용들을 쓰면서 나 스스로도 정리도 하고,
나를 아끼는 사람들로 부터 소중한 충고와 격려도 듣고자 한다.

기대하시라~ ^^

KOSTA/USA-2008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그렇다면,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초월해서 영원을 갈망하며 살고, 한편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균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비복음적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그 길을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해답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거시적 관점에서의 헌신은 옛날 얘기?

한 달 남짓 전에 미국 서부의 어느 지역에 사는 한 동역자가 직장일로 필자가 있는 동네를 찾았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 저녁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요즘 젊은 학생 세대에게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제는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서정적인 신앙만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의 추세 속에서 신앙도, 헌신도 모두 개인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그러한 현실에 깊이 동의하며 안타까워했다

그 저녁의 대화 이후 필자의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이제 그러한 세대는 지나갔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함께 부를 노래도, 함께 외칠 구호도, 함께 흔들 깃발도 잃어버린 그런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인가. 그리고 이제는 다시 이 세대를 움직일 그 무엇은 개인적, 서정적 신앙 이외에 대안이 없는가.

미래의 꿈은 정규직? 

얼마 전 본 한국의 어느 TV 드라마에서 본, 대학을 가기 싫어하는 어떤 고등학생과 그 학생에게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는 부모의 대화가 생각난다. 학생이 대학을 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부모는 대학을 가서 네 꿈을 펼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로 설득하려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느닷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째 취업 준비생으로 있는, 옆에 있던 삼촌에게 미래의 원대한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취업 준비생 삼촌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자신의 꿈은 ‘정규직’이라고 답했다. 그 고등학생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나더러 대학졸업 후 장래 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대화를 더 극적으로 그리고자 과장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캠퍼스와 지역교회에서 만나는 학생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의 꿈도 이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좋은 배우자 만나고, 좋은 직장 잡고, 좋은 교회에서 좋은 신앙생활 하는 것.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꿈을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결국은 그 꿈이 ‘정규직’인 것이다.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일,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는 일,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장래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약간 세련된 표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정규직이 되거나,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을 잡고, 좋은 교회에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 때문에 그것을 얻고자 하느냐, 그것을 얻고자 하는 뒤에 숨어 있는 동인(motivation)과 세계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 잃어버릴 수 없는 꿈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할 수 없는 세대가 정말 되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럼 이제는 그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언급하는 일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하나님과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을 서정적, 개인적 영역에만 제한시킨 채 그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만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자 했을 때 처음 이야기했던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선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 아닌가. 그 핵심가치를 위해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헌신, 희생하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를 붙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만나는 젊은 학생들에게서, 바로 그들의 삶 전체를 꿰뚫어 통합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목마름을 여전히 볼 수 있지 않은가. 20세기에 만났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과 인생을 던질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함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 나라는, 포기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우리 모두의 궁극적 꿈이자 희망이 아닌가. 문제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같은 핵심 가치가 더는 이야기되지 않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KOSTA/USA-2008 집회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KOSTA/USA-2008 집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대해 본다

첫째, 삶을 의미 있고 아름답게 통합하여 살아갈 가치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음을 깊이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이미 가진 삶의 길에 대한 내용이 얼마나 심하게 비뚤어져 있는가 하는 내용을 보며 함께 애통해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둘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길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기를 기대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 안의 거짓되고 어그러진 가치관들이 상대적으로 더 초라하게 드러날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통해 제시된 궁극적 삶의 가치들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목마름이 우리 안에 생길 것이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통해 제시되는 삶의 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아직 그 가치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궁극적 삶의 길을 내 것으로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고, 이미 그 가치를 알고 있으나 삶 속에서 통합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새롭게 정리하고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유일한 삶의 바른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변화가 있기 원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세대에서 유일한 삶의 바른길을 선포하고 전하는 일들에 많은 이들이 함께 헌신하기 원한다. 세상이 그토록 목말라 보고 싶어 하는 올바른 삶의 길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고, 이제 우리에게 함께 부를 노래가, 함께 외칠 구호가, 함께 흔들 깃발이 있음을 선언하기를 원한다

KOSTA/USA-2008 집회를 통해 큰 감동을 하고, 집회가 성황리에 마쳐지는 것은 분명히 이 집회를 준비하고 참석하는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집회를 통해 부어주실 큰 은혜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KOSTA/USA-2008 집회 이후 하나님께서 미국 내 한인 청년 학생 디아스포라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그로 말미암아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선포되고 확장될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우리를 흥분시킨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그 길을 보게 하시고, 그 길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허락하시며, 그 길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이메일 트래픽

요즘 여러가지 급박한 일들이 많이 겹쳐서 좀 정신없이 지낸다.
회사애선 곧 있을 학회에서 발표할 자료와 flexible display demo를 만들기 위해서… 정말 정신없이 실험을 하고 있고,
몇몇분들과 길게는 한시간 짧게는 30분 가량의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의견을 듣고 상의하고 해야할 일들이 계속 있었고… 아직도, 일주일 내에 heavy한 전화통화나 논의들을 해야할 것들이 5건 정도 더 남아있다. 어제 하루동안에도 그렇게 전화통화를 한 시간이 총 2시간이 넘었다.
그리고, 어제는 드디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이메일의 트래픽이 100개에 달했다. 아마도 기록이 아닐까 싶다. ^^ (그냥 읽을 필요도 없는 이메일 말고… 내가 읽고 생각하고 respond 해야하는 이메일 +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이메일을 더한 것이다.) KOSTA 관련 이메일이 그중 70% 이고… 회사 이메일이 15%… 그리고 이 지역에서 섬기는 것 관련된 이메일, 가족, 아는 사람 이메일들이 나머지이다. 그중 어떤 이메일은 그 이메일 하나를 쓰기 위해서 30분 가까이 고민하고 다시 생각하고 해야하는 것들도 있다.

물론 그렇게 하고도 해야할 일들을 다 못하고… 이렇게 버벅대고 있지만.

때로는… 이런 짐을 좀 나누어 질 사람들을 찾아보기도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내가 물론 부족한 탓이기도 하지만… 정말 faithful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회사 일이든, KOSTA 일이든… 뭐든 간에)
혹, 함께 짐을 나누어지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짐을 나누는 것 자체가 내게 일이되어 이렇게 상황이 급박해지면 더더욱 그 짐을 나누는 것이 힘들게 된다. 해야할 일들에 대해 설명하고 하도록 돕고 잘 되었는지 같이 점검하고… (사실 리더로서 해야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인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리더쉽도 참 부족한 사람인 듯 하다)
그러다보면 지치기도 하고, 답답해 하기도 하고… 원망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뛰는데… 저 사람은 내가 이런것을 알면서도 왜 도움의 손길 한번 내밀지 않는 걸까.

그런데,
내가 최근 배우고 있는 것은,
치열하게 사는 lifestyle 자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순발력, 체력, 열정, 기획력, 분석력… 등등이 모두 필요한 듯 하다)
따라서 그렇게 살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은 매우 부당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들 나름대로의 role이 있는 것이고… 나와는 다른 영역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그런 사람들로부터 많은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하는 것 같다.

예수님을 알고… 처음 10-15년 동안은…
예수님을 위해, 영원한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사는 법을 배워왔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 7-8년 동안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포용하고 이해하고 섬기는 법을 배우기 위해 struggle 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진보가 때론 너무 더디게 느껴진다.

Multi-tasking

나는 늘 멀티 태스킹을 하면서 사는 것 같다.
어느 한 순간을 놓고 봤을때, 내가 어떤 한가지 일만을 하고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한편에서 실험을 돌리면서 생각을 하고 있다.
실험장비가 돌아가는 약 9분 정도 동안 이 글을 써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에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마친 이후, 그 다음에 어떤 일을 할 것인가가 항상 머리 속에 있기 때문에… (대략 10분-15분 가량의 단위로 시간을 쪼갠다)
어떤 일을 하면서 그 다음 일에 대한 계획도 끊임없이 머리속에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point를 매우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나는 몹시 힘들어 하는 것 같다.
2분만에 이야기할 것을 30분씩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다보면…  혹은 이미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나는 이미 그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 머리속에 담은 이후에 한참 다른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 다른 생각을 하는 자유조차 대화중에 주어지지 않는다거나 (그 사람이 계속 내 반응을 요구한다든가…) 하면 참 많이 힘들어 하는 듯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직장 동료 한 사람이 와서 3분이나 이야기를 하고 갔다.
내가 다 아는 얘기를 새로운 이야기처럼 하고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이걸 9분만에 마치고 실헝장비로 가야 그 다음 실험을 하고…
그래야 오늘 12시에 예정된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형제와의 점심 식사 이전에 계획된 실험들을 다 마칠 수 있는데…)

어떤 사람과 목적없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잘 하지 못한다.
시간을 10분 간격으로 쪼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루종일 하면서 지내도,
자기전 내 outlook에는 그날 다 끝내지 못한 일들이 8개씩 뜨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때로… 그저 시간을 낭비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저 무엇인가를 아뢰는 것을 하지 않는 상태로… 30분이고 1시간이고 그냥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말씀도 읽다가… 눈을 감고 하나님 생각을 하고… 심지어는 그러다 깜빡 졸기도 하고…

그런 시간이 내 삶에 고갈되면,
나는 이내 쫓기는 마음이 되고 불안해하는 듯 하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렇듯,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 사람과 공감하고… 함께 시간을 죽이는 일도 중요한데…

내가 내 생명을 다해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낭비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섬겨야 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낭비할 계획을 미리 좀 짜놓는 것이 필요한 듯 하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도,
시간낭비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KOSTA/USA-2007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KOSTA를 섬기다 보면, “KOSTA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KOSTA를 만난지 12년째가 되는 필자로서도 어떤 의미에서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KOSTA란 무엇일까, 무엇이 KOSTA를 KOSTA 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위해 딱딱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넘기며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내용을 정리해보았을때 사람들이 흔히 KOSTA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매우 다른 KOSTA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KOSTA는 집회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KOSTA

많은 사람들이 KOSTA를 여름에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에서 여는 집회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KOSTA가 원래 추구하고 있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KOSTA는 집회를 포함한다. 그러나 KOSTA는 집회라기 보다는 KOSTA의 핵심가치(core value)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만드는 운동(movement)이다. KOSTA가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 규정(describe)하는 것은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다고 우리가 믿는 소망의 내용때문이다. 만일 KOSTA가 많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일회적인
집회를 통해 소부흥(mini-revival)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KOSTA는 집회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KOSTA가 꿈꾸는 것은 KOSTA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이, (1) KOSTA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에 동의하게
되어 (2) 그 핵심 가치를 가지고 각자의 삶에 살 뿐 아니라 (3) 그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4) 그러한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고 (5)
그들이 몸을 담고 속해 살고 있는 피조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름에모여서
함께 하는 집회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KOSTA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KOSTA, 2007년에는

집회를 앞두고 왜 갑자기 집회가 아님을
강조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금년 주제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금년
KOSTA/USA의 주제는 “이 세대롤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이다. ‘변화(transformation)’가 금년의
키워드이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변화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성령의 일하심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을 조차도 대량생산하고 싶어하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덕(virtue)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집회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완전한(complete) 변화를
경험할 수 있으면 참 감사한 일이겠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코스탄들이 진정한 변화가 얼마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진정한 변화가 어떤 이들에게는 시작되는, 어떤 이들에게는 한단계 큰
도약을 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새롭게 갱신(renew)되는 일들이 있기를 기도한다.

건강한 혼란과 무질서를 기대하자

집회를 전후하여 이번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의 집회에 참석하는 코스탄들에게는, 결단의 기도 이전에, 뜨거운 찬양 이전에, 감격이 있는 말씀 이전에 올해의 주제를
붙들고 고민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고민의 시작은 바로 혼란과 시작되어야 한다. 혼란은 무질서이다. 혼란은
불확실성이다. 혼란은 미확정이다. 혼란의 상태에서는 아무런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혼란은 좌절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그런 혼란이 필요하다. 이런 혼란의 상태는 이 세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들 자신의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한 첫 삽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변화의 열매를 맺기 위한 씨앗이 되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창세기 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니)의 혼란이 있어야 1:3 이후의 창조의 열매가 있는 것이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열매와 결단으로 연결되는 집회가 되었으면 한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마음과 창조와 질서로 끝맺음을 하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넘어서는 집회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 진다 하더라도 그저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들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우리가 예상한 것들만이 일어나는 집회라면 그것은
진정 우리가 바라는 집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의 예측과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을 너머서 더 크게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대한 기대감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이 집회의
주인공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진정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를 갈망하고,
그러한 변화에의 길에 들어서서, 다른 이들과 전 피조세계를 그 변화로 이끌어내는 KOSTA/USA-2007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이, 이번 집회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어나길 기도한다.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내가 성숙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만 못하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동역을 하거나, 사역을 하거나, 그냥 함께 생활을 하거나…

함께 하는 그 사람들이 누가 되었건 간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미숙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미숙한 사람들에게 지나친 성숙함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관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듯 하다.

어떤 사람이 때로 비이성적인 감정적 반응을, 마치 논리적인양 포장을 해서 내어 놓을 때에도,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미숙함을 깊이 감안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면,

내가 함께 비이성적/감정적이 되는 오류를 많은 경우 피할 수 있는 듯 하다.

반대로, 내가 스스로 비이성적인 감정적 반응을, 마치 논리적인양 포장해서 내어 놓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면,

내 미숙함을 나 자신과 상대에게 스스로 인정하고,

미숙함이 또 다른 미숙함을 낳지 않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듯 하다.

또한 내가 스스로 빠지기 쉬운 착각은,

내가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경우,

내 비뚤어진 성숙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고,

내 미숙함을 성숙함으로 착각하여 멈추지 말아야할 성화에의 노력을 그치게 되기도 한다.

내 부족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기도하고,

나의 작은 인격에의 열매를 크게 과장해서 보는 우스꽝 스러운 모습을 그려내기도 한다.

내가 이땅에 사는 한,

나의 이러한 미숙함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미숙함이…

계속 나를 힘들게 할수도 있겠지만,

날마다 조금씩, 내 안에서 이 모든 미숙함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넉넉함이 성령 안에서 키워지면 하는 바람이 크다.

세상의 많은 미숙함들을,

내 삶으로 감당하여 지고 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최근 참 많이 하는 고민이다.

거의 3개월동안 동-서부로 떨어져 있기도 했거니와,

동생의 결혼 시즌에 즈음하여,

내 결혼 생활도 다시 돌아보면서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가슴 찌릿한 느낌

보고 싶은 마음

함께 있으면 좋은 것

정(情)

이 무엇도 딱 하나…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을 집어낼 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역시 해답은 아주 잘 정리된 성경 말씀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이’

이것에는,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아내를 위하는 것

오래 참음

함께 있어줌

들어줌 (listening)

인도함

친구가 됨

함께 즐김

섬김

등등이 함축되어 있는 정말 환상적 표현이다.

결혼한지 7년 반만에,

새롭게 에베소서에서 내가 아내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자세를 발견한다.

말씀이 무겁다…

요즈음은,

말씀이 매우 무겁다.

이전엔,

말씀을 묵상하면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달콤함을 즐기면서 후루룩 먹는 재미를 즐기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즈음엔,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한약 보름치를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말씀의 작은 passage에 담긴 뜻의 실존적 의미를 내 삶에서 찾아내는 작업이 조금은 버겁게 느껴질만큼,

말씀이 내게 무겁다.

내 삶의 기준과 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가볍고 볼품 없었음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나라 백성 다움을 내 삶에 갖추는 것에 관한한,

난 참 slow learner 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정말 내 삶을 다 쏟아내어서…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 다움을 온전히 이루며 살고싶은 목마름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 처럼 커지기만 한다.

너무…너무… 목이 마르다.

생일을 맞는 다는 것

뭐 생일을 한두번 지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60세 생일 같이 뭐 특별히 기념할 것도 아니고…
그저 30대 중반에 나이 한살 더 먹는건데,
생일이 뭐 그리 대수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하나님께선 내 생일에 어떤 생각을 하실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처음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던 그 순간 하나님께서 가지셨을 기쁨,
처음 예정일보다 두달 빨리 나와서 인큐베이터에 있었던 어린 아이의 모습을 정말 자애로운 아버지의 눈길로 보셨을 하나님의 모습…

그런 의미에서,
내 생일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겠지.

그저 매년 한번 지나는 의례적인 날이 아니고,
웃고 즐기며 케잌먹고 노는 날도 아니고,
정말 내가 내 생일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처음 태어나던 바로 그 순간부터 한순간도 나를 놓지 않고 지켜오셨던 그 하나님의 관심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의미에서,
내 생일을…. 내가 축하한다.
나의 태어남을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인해서.
축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내 경험을 상대화 하기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 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뜨거운 물에 한번 데인 사람은, 뜨거운 것을 조심하는 것을 인생의 모토로 삼는다.
어려서 가까운 사람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은, 무병장수가 인생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 하려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많이 발견된다. 특히 자칭타칭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래서 아마도 생각이 조금 다른 부분을 함께 포용하지 못하고 다투는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가령,
기도를 통해서 신앙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은 말씀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메말랐다고 비판한다.
혹은 말씀의 오묘한 맛을 깨달았던 사람은 기도에 빠진 사람들을 무식한 반지성주의자로 매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나이가 들어가면 갈 수록 더 심해지는 듯 하다.

나도 물론 역시 이런 면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 경험을 절대화해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모습은 내가 스스로 조심하려 해도 쉽게 나타나는 내 죄성이다.

바라기로는,
나는 나이가 들면 들어갈수록,
내 경험을 상대화할줄 아는 지혜를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하지 않는 자세와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

30대 중반을 지나 30대 후반을 향해서 가는 나이에,
정말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