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집

새집으로 이사온지 거의 열흘이 되어간다.
아직도 우리 다람쥐 두마리가 들어오려면 한달가까이 더 있어야 한다.

내가 가지고 들어온 짐은 별로 되지 않기 때문에,
에이… 그냥 뭐 이렇게 대충 널어놓고 살다가 나중에 정리하지… 하면서 지저분하게 지내다가,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마음먹고 자그마치 30분이나 들여 널어놓은 짐들을 다 정리했다.

정리하기 이전엔 그래도 꽤 짐이 많아보였는데 ^^
정리를 하고 나니… 집이 더 텅 비어보인다.

텅빈 이 집도, 텅빈 내 마음도, 늘 바쁘지만 텅빈 내 일상도,
채워질 날이 이제 불과 한달 남짓 남았다.

시간이 부족한가, 열정이 부족한가, 체력이 부족한가

요즈음,
내가 하고 있는 일 하나 하나에 정말 마음을 쏟아 하고 있지 못한다.

사람들을 말씀으로 섬기는 일이나, 회사에서 실험을 하는 일이나,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나, 아주 단순한 노가다 까지도…
하나 하나에 마음을 쏟아 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전같으면 쉽게 그 이유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 으로 돌렸던 것 같다.
하는일이 많고, 시간이 없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다.
나에게는 여전히 빈둥거리며 그냥 지내는 많은 시간이 있고…
훨씬 더 시간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렇다면,
체력이 부족한걸까.
내가 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꾸만 쉬어주어야 돌아가는 걸까.
글쎄, 그것도 딱 맞는 분석은 아닌 것 같다.
지치지 않은 상황에도 쉽게 게을러지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정이 부족한걸까.
매우 정답에 가까운 분석인 것 같긴 하지만…
열정의 부족으로 모든 것을 덮어씌우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원인일까.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내가 많은 일들에 마음을 담아 할때와 그렇지 못할 때 큰 차이 가운데 하나는…
내 기도생활의 건강함이다.

내 기도생활이 삶의 모든 부분을 엮어 주는 힘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삶의 모든 부분이 잘 정리되고 엮여졌을때 기도가 잘 되는 것인지…
닭과 달걀의 argument인 것 같기도 하고…
글쎄…

사랑의 빚

벌써 지금으로부터 10년쯤 된 일이다.
내가 어느 지역교회에서 열심히 섬기다가 여러가지 여건으로 그 교회에서 더 이상 섬기지 못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인간적인 아쉬움과 안타까움, 섭섭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내 영혼은 지쳐있었다.

성경말씀으로 사람들을 세우고, 양육하고 훈련하는 값진 일 이외에,
비본질적인(?) 일들에 마음을 많이 빼앗겼던 탓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한국에서부터 들어오던 Gate Bible Study 라는 성경공부 모임의 문을 두드렸다.
12월 추운 겨울이었는데…
그 성경공부에 참여해서 말씀을 나누며… 삶을 나누었던 그 첫 모임의 감격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 그래… 성경공부라는게 원래 이런거였지!
이렇게 말씀을 깊이 연구,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서로 격려하고…
지친 사람들을 섬기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결국 그 모임에 얼마간 나가다가…
새 그룹을 ‘개척한다’고 선언하고…
그 당시 우리가 살던 기혼자 학생 아파트에 3명이 모여 성경공부를 시작했었고… 결국 그 모임은 25명까지 모이는 모임으로 성장했었다.

지난 주말에는,
그렇게 우리 가족을 Gate Bible Study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던 선배님 부부와… 또 우리가 보스턴에서 말씀과 삶을 나누던 몇 가정과 함께…
보스턴에서 간단한 저녁식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참 많은 사랑의 빚을 졌다.

존경스러운 선배님들

내가 연관되어 있는 Christian ministry 가운데 하나에서,
요즘 다소 지저분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소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선배님들로부터 많은 조언을 듣고, 또 그분들이 나서서 사람들과 사건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느낀다.

한분의 선배님은, 순수함 그 자체로 가득찬 분이시다. 동기의 순수함에대한 수없이 많은 도전을 나는 이 선배님으로부터 배워왔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짓없는 헌신.
이분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신이 모든 비난을 다 받아도 좋으니, 자신이 나서서 이 문제의 근본을 눈물로 밝히고, 이 일을 해결한 후에, 혹시 ministry에 있을수도 있을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 스스로 물러나겠노라고… 그렇게 의분을 참지 못하신다.

다른 한분의 선배님은, 온유함 그 자체로 가득찬 분이시다. 사람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하고 절대로 내치지 않고 품으시는 분이시다. 이분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떤 과정에서도 단 한사람이라도 – 비록 그 사람이 ‘악인’이라 하더라도 – 상처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정말 시간을 낭비한다 싶게 느껴질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겸손하게 말을 들으시고, 때로는 그로인해 얼토당토않은 오해도 받으시면서 그렇게 섬기시는 분이시다. 이분을 보면 온유와 섬김이 그저 흘러 넘친다.

얼핏 보면 이 두분의
방향이 매우 다르지만…  그래서 마치 함께 하고 있을때 이 두분 사이에 큰 갈등이 있을 것 같아 보이기 까지 하지만…
동일한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랑,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 이 과정에서 나같이 어리버리한 후배까지도 보호하고 지켜주시려는 마음…
나는 정말 말할수 없이 깊은 감동을 받는다.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다가,
정말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모습을 몹시도 고통스럽게 바라보게 되다가도…
이런 선배님들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다.
아니… 그저 가볍게 경험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 뼈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를 새기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참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 성경의 해석

계속해서 KOSTA 간사님들과 신학훈련을 하고 있다. 다음은 John Stott 책에 나온 질문(영어)과 내가 만든 보조 질문들(한글)

6장 The Authority of the Bible 

– How are biblical revelation, inspiration, and authority different, and what are the three disclaimers we must add to these words?

– How did Jesus put his seal on both the Old Testament and the New Testament?

– How do we know that the apostles had the authority to speak for God?

6-1. 가령,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때, 어떤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성령에 취한 황홀경의 상태? 역사적 기록을 쓰기위하여 여러 자료들을 모아놓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과 같은 자세? 기도중에 묵상을 하면서 떠오르는 일들을 쓰고 있는 상태?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성경이 계시/영감에 의하여 쓰여졌고 권위를 가진다는 것과는 어떻게 연관이 됩니까?

6-2. 만일, 지금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어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갑자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어떤 문서를 작성하였다고 합시다. 그 문서가 성경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유를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7장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 What are the three teachers God has given to instruct his people, and what do we learn from them?

– What are the three principles of interpretation?

– What are some examples of why we should see the Bible as a whole?

7-1. 1970년대, 1980년대의 한국에서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붉은 용을 ‘김일성’ 혹은 ‘공산당’이라고 해석하는 설교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경해석은 어떤 원칙에서 잘못된 것입니까? 7장에서 John Stott가 제시한 성경 해석의 원칙에 근거해서 비판해 보십시오.

7-2. 당신이나 당신 주변에서 발견한 성경해석중, 성경 해석의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잘못 성경을 바라본 예를 들어보십시오.

어른을 섬기는 일

가끔은, 나보다 나이많은 ‘어른’을 내가 섬겨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 어른이 물론 존경받을만 하거나, 나를 잘 이끌고 인도해줄 수 있는 경우라면 내가 기꺼이 그 관계를 누리며 지낼 수 있으나…
그 어른을 내가 ‘이끌어야’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어른을 이끌어야 하는 경우에도 크게 두가지의 경우가 있다.
첫번째는 그 어른이 나로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있을 경우. 이럴 경우에는 내가 그분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섬기면서 무례하지 않게, 그러나 때로는 단호하면서도 직설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번째 더 어려운 경우에는 그 어른이 나로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없거나, 자신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혹은 나이어린 사람으로로부터 인도함을 받는 것을 ‘위협’으로 느끼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엔 참 여러가지로 힘들다.

많지는 않지만 내가 이런 두번째 경우에 빠졌을 경우에는, 나는 그냥 손을 들어버렸던 것 같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며 포기했다.

최근,
내가 존경하는 어느 선배님이 이런 상황에서 어른을 겸손히 섬기면서, 지혜롭게 대화를 하면서, 결국은 그 어른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어른에 대한 존경/존중과, 지키려는 진리에 대한 확신, 그것을 겸손하게 present 하는 자세,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모습, 그리고 결코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하고 매달리고 품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자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열정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도,
테그닉으로 이루어 지는 것도,
연륜으로만 만들어 지는 것도,
지식으로 세워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저분한(?) 이야기 하나. ^^

Ear wax가 당신은 wet 합니까, dry 합니까?

http://www.livescience.com/health/060129_ear_wax.html

대충 뒤져보니까,
한국인의 대부분은 Ear wax가 dry 하다고 한다.
전 세계인구의 대부분은 Ear wax가 wet 한데, 한국인을 비롯한 아주 일부 종족이 dry 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Ear wax가 wet 하다.
흠… 나는 사실은 한국인이 아닌게 아닐까. ^^

이사

어제 오후에 실험을 하려고 하는데 chamber를 여러사람이 쓰느라 내 차례를 얻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다가…
재빨리 cargo van 하나를 rent 하고, 대충 이것 저것을 싸서 van에 싣고 이사를 뚝딱 해버렸다!

짐 싣는데 30분, 짐 싣고 운전하는시간 30분, 짐 내리는 시간 30분.
총 1시간 반 걸린 이사였다!

아직은 텅 비어있는 새 집에,
조만간 몹시 까부는, 다람쥐 한마리와…
그 까부는 다람쥐의 체력을 당해내지 못해 허덕허덕 하는 큰 다람쥐 한마리가..
이사오게 된다!~ ^^

역사의 진보

최근, 존경하는 어느분의 설교를 들었다.
한동안 여러일로 쫓겨 설교를 한가하게(?) 들을 여유가 없었는데… 다소 밀린 숙제 하는 기분으로 보스턴 여행길에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그 설교중에,
성경의 세계관은 역사의 진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진보주의자’의 관점을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않다
는 말씀이 나왔다.

정말 그럴까. 성경적 세계관에 따르면 역사가 진보하지 않을까.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학문 활동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학문의 발전이라는 것을 이루시는 창조활동이다.
우리가 하는 정치 활동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정치질서를 만드시고 발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이런 관점은 그 설교하신 분이 다른 설교에서 말씀하신바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서 사회, 사상, 역사를 발전시키는 행위 역시,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인간의 힘으로 역사를 발전시켜 유토피아를 이루려는 접근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세계관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모든 노력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사의 진보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문화명령(The Cultural Mandate)에 순종하는 행위가 아닐까.

사상과 사회와 역사를 발전시켜 인권을 증진하고, 억압과 불평등을 개선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차별, 반칙, 부정등을 없애는 일들은 크리스천들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심지어는 그것이 잘 안될것을 안다고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