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y to be spent

어제 설교중에 나온 말.
정말 마음 깊이 공감하는 말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 재능, 경험, 재산, 시간, 열정, 체력, 선호, 기회, 환경 -을 다 집어넣고 사는 삶을 살도록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그중 일부는 내가 ‘reserve’에 남겨두고 사는 삶이 아니라…

아아…
정말 내가 살고싶은,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런 삶

학생사역자는 댄스가수

“학생사역자는 댄스가수와 같다”

내가 나름대로 여러 생각 속에서 정리한 것이다.

analogy를 풀어보자면 이렇다.
– 나이가 30이 지나, 40이되도록 댄스가수를 하는 사람은 정말 흔하지 않고,

– 대개 나이가 들면서 댄스 가수를 그만두는 것은, 체력이 달리거나, 시대의 빠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 그 수명이 매우 짧아서 반짝 하는 순간에 온 힘을 다해서 (무리가 된다 싶게) 그렇게 뛰어야 그 경험으로 나중에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직접 댄스가수가 되는 것 보다는 댄스가수를 키우는 프로듀서나 기획사 사장 같은 사람이 되어서 ‘그 바닥’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언젠가 이 블로그에 이 내용을 쓴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져보니 없었다.)

Singleness

현대에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독신’으로서의 삶이 대안적 삶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해야하는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Stanley Hauerwas가 그랬다고하던데… (어디에서 그랬는지는 잘 못찾았다. -.-;)
기독교가, 독신의 삶을 정상적인 삶의 형태로 인정한 최초의 세계관이었다고.

나야 물론…
독신이 아닌 삶을 감사하며 누리며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건강한 독신으로서의 삶이 이 세상 속에서 나그네된 삶의 대안적 형태가 됨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다소 뜬금 없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겠으나, 최근 몇개월 동안 몇개의 연결된 묵상중 일부이다. ^^)

QT로 양이 차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QT는 지난 20여년간 내 신앙생활을 지탱해온 중요한 축이었는데…

요즘은 그 QT가…
뭐랄까… 양에 차지 않는 느낌이다.

그리고 QT를 하면서 자꾸면 역사적 context등을 따지는 습관들이 나와서,
나 스스로를 당혹하게 만든다.

나의 이런 ‘증상’과 관련해서…
다음의 기사가 매우 눈에 띄었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829

Outlook 없이 못살아

나는 내가 해야할 일등을 늘 outlook에 update 시켜놓고,
그것을 내 iPhone과 sync 해서 일정을 관리한다.

하루에도 2-3번씩 그 일정을 수정하거나 update하고,
내 outlook alarm에는 늘 2-3가지의 일이 overdue로 떠 있다.

한동안은 매일 하는 실험일정까지도 구체적으로 올려놓고 update하곤 했는데,
너무 심한것 같아 요즘은 그것보다는 좀 더 설렁설렁(?)하게 해놓고 산다.

그렇지만,
outlook 없이 사는 삶은 거의 상상하기 어렵다.

이것은 잘못된 것일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그런 lifestyle을 가지고 사는 것은 outlook과 같은 tool을 사용해서 시간관리를 하면서 살 것으로 assume되는 그런 사회 속에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의 context 자체가 그렇게 늘 multi-tasking을 하면서, 시간관리를 하면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지,
내가 outlook과 같은 scheduling tool 자체에 중독이 되어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내가 이런 lifestyle이 아닌, 좀 더 시간적으로 여유있는 lifestyle을 선택했다면 나는 그 context 속에서 나름대로 시간관리를 하면서 사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느긋함’을 무리하게 누리려 한다면,
무책임하고 게으른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바쁘게 살지만 쫓기며 살지 않는 균형과 지혜가 중요한 것 같다…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예전에,
이선희가 부른 노래 중,
“알고 싶어요” 라는 곡이 있다.

그 가사에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라는 부분이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아무리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더라도,
내가 바쁠때 그 전화가 반가운 사람이 없다. -.-;

적어도,
내 아내가 하는 전화는 반가워야 할텐데…

점차 바쁠 때 전화해도 반가운 사람이 늘어나서,
누구든, 언제든, 그 사람을 위해 내 시간을 나누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게으름을 어찌할꼬…

게으름은 성품일까, 아니면 극복해야할 죄일까.

점액질의 사회에서 살다보면 마음이 느긋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으로 치부되기 십상인데…
그런 것을 감안하면 너무 쉽게 죄로 밀어버리는 것은 잘못일테고,

게으름을 성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인 거의 대부분 죄로서의 게으름에 빠져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것을 감안하면 죄라고 이야기하며 강하게 극복하도록 촉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내 최근의 생각의 경향은 게으름을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보는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다.

어찌되었건 간에, 게으름은 seven deadly sins 가운데 하나가 아니던가.

선수로 뛰어야 할 때와, 선수를 키워야 할 때

리더쉽에서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언제 내가 선수로 뛰어야 하는가 하는 것과, 언제 내가 뒤로 물러나서 후배들이 잘 뛰도록 격려하며 후배를 키워야 하는가 하는 것을 구분해내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내게 참 많이 부족한…

영적 은사가 가져다주는 착각

최근, 운동을 하면서 들은 것은, 모 신학교에서 “Postmodern 시대에 그리스도를 선포하기”라는 내용의 시리즈 강좌이다. (아마 한학기 과목인 것 같기도 하다.)
Tim Keller와 Ed Clowney 가 공동 강의를 한 것인데…
어떤 것은 참 깊은 깨달음을 주었지만 어떤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중,
너무나도 당연한, 그러나 내가 한참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한마디.

“영적 은사를 많이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 은사를 활용해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은혜안에 거하며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7장의 다음 본문을 인용하였다.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음이 바짝 말라있고, 배우자가 아닌 이성에 음란한 마음을 품고 있고, 자기 배우자를 미워하고 있고, 다른 이들에 대한 질투심에 가득차 있고, 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에 가득차 있다 하더라고,
그 사람이 매우 훌륭한 설교를 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훌륭한 설교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주님과 건강하게 동행하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된다고.
(특히, 훌륭한 설교가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그런 착각을 쉽게 한다고)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
내가 얼마나 그 일을 잘 하느냐,
심지어는 내가 어떤 value system을 가지고 그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내가 올바로 서있느냐 하는 것을 재는 바른 잣대가 되지 못한다.

나 같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꼭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고 새겨야할 말이다.

사려깊음

사려깊음은, 성품일까 재능일까?

성품이라면 그것이 개발될 수 있는 것이고,
재능이라면 개발될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사려깊음을 성품으로 보았다.
그런데, 점점 그것이 성품이라기 보다는 재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생각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이나 다른이들의 사려깊지 못함을 좀 더 용서하고 수용하려고 하고 있는데…
글쎄.